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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특별한 선물(꽃도둑 백은하, 너에게 花를 주다) 조회수 17612
봄이다. 겨울 내내 그 자태를 꽁꽁 숨겨둔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움을 터트린다. 이럴 때면 문득 그녀가 떠오른다. 바로 꽃도둑 백은하다. 글그림 작가 백은하는 얼마 전, 마음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특별한 책을 냈다.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너에게 오늘은 花를 내겠어요!”라고 투정 부리듯 말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내 프러포즈를 받아줄래?”라며 용기 있는 고백을 한다. 꽃도둑답게 언제나 ‘꽃’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백은하의 선물은 고맙고 소중하다. 그리고 감동으로 다가온다.

취재 | 박현영 기자 (hypark@jungle.co.kr), 사진ㅣ 스튜디오 salt

지난해에 이어 다시 찾은 백은하의 작업실은 반토막(?)이 나 있다. 같은 건물 작은 평수의 작업실로 옮긴 것. 이전 작업실보다 어떠한지 몇 번이나 묻는 그녀. 지금보다는 넓고 큰 창이 있던 그 작업실이 그립나 보다. 그러나 아담해진 공간은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창밖 풍경은 내부의 아늑함과 제법 잘 어울리기에, “아주 좋아요”라고 말해준다. 공간 하나에도 애착이 강한 그녀의 작업실 곳곳에 ‘꽃’을 응용한 다양한 소품과 그녀의 꽃그림이 빛을 내고 있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고마운 부모님께, 자랑스런 내 아들과 딸에게… 사랑을 담은 꽃은 화해의 메시지가 된다. 전날 심하게 다툰 남편이 아내에게 말없이 건네는 꽃, 아내의 화는 눈 녹듯 사라진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읽는 꽃은 백은하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꽃은 줄넘기하는 아이들이 되기도 하고, 할머니의 뒷모습, 다정스런 연인들이 되기도 한다. 그녀에겐 공기와도 같은 꽃. 그녀가 꽃을 선물로 건네는 건 그래서 당연해 보인다. 그녀의 꽃 선물은 작업실 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업실 문 앞에 서면, 403호와 풍선을 든 아가씨 그리고 꽃잎 하나가 인사를 한다. “어서 오세요. 이곳은 백은하의 작업실이랍니다.”
얼마 전 퀵서비스로 마른 선인장 꽃이 배달됐다. 백은하의 그림을 좋아하는 팬이 보낸 것. 그녀가 팬이 보낸 선물을 그냥 담아둘 리 없다. 마른 선인장 꽃을 액자 프레임과 컵을 이용해 오브제화했다. 꽃이나 식물은 언제나 그녀와 호흡하고 있다. 마치 흰 벽에 그려진 그림처럼 생화가 거꾸로 매달려 있거나, 작업 중인 책상엔 꽃잎 가득한 통이 놓여 있고, 창가에 놓인 꽃은 햇살을 머금은 채 사랑스러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꽃 선물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느새 포장을 했는지 백은하가 아트북 <너에게 花를 내다>를 건넨다. 순식간에 포장을 한 것도 놀라웠지만, 달랑 빨강색 실과 손톱만큼 작은 꽃봉오리만으로 포장한 것을 보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말하는 도중 쓱쓱 빨강색 실을 십자 모양으로 묶어 꽃봉오리로 포인트를 준 백은하식 선물.
백은하는 번쩍거리는 포장지로 꽃이나 선물을 싸면 지레 질린단다. 살갑고 소박한 포장을 좋아해 주로 집에 있는 실과 화분, 천을 이용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천으로 한 번 싸고 실로 십자를 잡아준다. 그리고 화분에게 말한다. “이파리 하나만 다오, 열매 하나만 다오, 고맙다.” 이파리나 열매 하나를 살짝 가위로 잘라서 십자로 묶은 실 사이에 꽂아주면 포장 끝. 천이 없다면 그냥 실로만 묶고 이파리나 꽃, 열매 따위를 하나 꽂아줘도 충분하다.

감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작업에 쓰는 꽃잎 두어 장을 건넨다.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책갈피에 넣어둔다. 이내 모양이 서서히 변해가는 꽃잎이 그리워 자꾸 책장을 펼친다. 마치 그녀의 작품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기분. ‘꽃다발’이 아니라 ‘꽃잎’을 건네는 것이 더 마음을 움직임을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엄마께 드릴 선물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자꾸 물어본대요. 왜 집에 딸 꽃그림 하나 없느냐고. 그러고 보니 엄마께 그림 한 점 안 드린 거 있죠. <내 프러포즈를 받아줄래?>는 엄마가 지금까지 낸 어떤 책보다도 좋아하세요. 그래서 책 속 그림 하나를 드리려고요.”
기뻐할 엄마를 생각하고 미소 짓던 그녀가 아버지 얘기를 잇는다. “아버지는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 남겨주신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몇 년 전 깨달았어요. 우리 집 화단에 그 많은 꽃을 심으신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내 마음에도 화단을 심어주신 거라고. 덕분에 나는 꽃으로 먹고살아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마당에서 그러셨어요. 우리 집에 꽃이 마흔 세 가지 있다고. 그땐 꽃이 뭐, 공기 같은 거였고 너무 지루한 일상이어서 잘 몰랐죠.”
유년 시절을 꽃과 나무가 많던 집에서 보낸 백은하는 아버지로부터 이미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메마른 꽃잎에 새로운 생명과 이름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준 마음의 화단이 있었기 때문. “제 꽃잎 그림은 순전히 8할이 꽃이 하는 일이에요. 꽃을 따서 말리고 나면 그 녀석들이 내게 뭔가를 보여주죠. 어떤 사람의 포즈와 표정 같은 건데,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요. 웃고 울고 아프고 달리고 놀고 기다리는 온갖 모습을 보여주면 그제서야 저는 펜을 들어 살짝 드로잉으로 도울 뿐이에요.”

식물은 언제나 백은하에게 선물을 준다. 꽃도 주고 잎도 주고 열매도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에게 선물을 받는다. 그것도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표정을 가진 선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