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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울의 타이포 여행 조회수 17329

요즘 서울은 걷기에 참 좋은 날씨입니다. 서울에서 타이포 여행을 할만한 재미있는 특징이 있었던 몇 군데가 생각 났는데, 이왕이면 테마를 가지고 하루 반나절 정도 걸으면서 구경할 수 있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서울 북촌 일대를 코스로 잡아보았습니다. 발이 편한 운동화를 신고 가방엔 물통을 하나 넣고… 물론 카메라도 하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자, 그럼 출발합니다.

취재 ㅣ 이종훈 소담출판사 디자인팀장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와서 효자동 방면으로 가면 서울인데도 대부분 건물이 높지 않습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 나오듯이 이곳은 청와대가 가까워 보안 때문에 건물을 세울 때 제한이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신축 건물이 적은 편이고 오래된 건물이 많습니다. 몇년 전부터 인사동, 안국동에 모여 있던 작은 규모의 전시장이 점점 확장되어 조금씩 이곳 북촌 일대 외진 곳에 생기고 있습니다.

효자동에서 처음 마주친 갤러리팩토리는 이 동네 건물답게 기존의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모던한 인테리어디자인이 대비되어 독특한 인상을 받습니다. 배관용 PVC파이프로 만들어져 있는 갤러리의 사인물이 매우 감각적입니다. 갤러리팩토리 바로 옆에는 1년 전쯤 오픈한 디자인스튜디오 워크룸이 있는데 이곳 또한 오래된 건물 1층에 위치합니다. 대부분의 스튜디오와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일단 맛보기 코스로 효자동은 이 정도로 보고 본격적으로 북촌의 중심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효자동을 지나서 경복궁에 도착해 널따란 경복궁 마당을 가로질러서 삼청동으로 이동하는 길에 매표소, 환전소의 사인물을 볼 수 있습니다. 가끔 날씨 좋은 날 퇴근길 중간에 내려서 이곳을 걸을 때마다 보이는 이 사인물은 볼 때마다 참 세련되고 잘 만들었단 생각이 듭니다.

경복궁을 지나 삼청동 입구에 들어서면 각양각색의 멋진 미술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번 타이포 여행의 테마인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보여주는 학고재갤러리를 만나게 됩니다. 원래 출판사 사무실로 쓰이던 한옥을 리모델링하여 갤러리로 만들었는데 모던한 철재 대문 위에 단정하게 레이아웃된 학고재의 로고는 한자와 영문의 대비, 건물과 건물의 부속물이 주는 대비를 보여줍니다.

좀 더 삼청동 안으로 들어가보면 데이트 코스로 몇 번쯤 와봤을 북카페와 옷가게들이 나란히 늘어선 2차선 가로수길이 이어지는데, 이번 여행엔 이 길을 과감히 포기하고 옆길로 새겠습니다. 진선북카페를 지나서 삼청동경찰서에 도착하면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있는데, 이번 타이포 여행을 하면서 이 길이 영화촬영 장소로 종종 사용되는 정독도서관길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양옆으로 아주 작고 예쁜 가게들이 나란히 모여 있는데요, 가게 하나하나의 꾸밈새가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계속 걷다 아트선재센터를 만나서 왼쪽으로 몇 걸음 가다 보면 가회동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곳은 제가 예전에 근무했던 회사가 있던 곳이고 요즘도 종종 지각할 때 택시를 타고 지나던 지름길이라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걸으면서 자세히 보니 그동안 새로 생겨난 숍의 아름다운 간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촌 중에서도 가회동에서 마주친 몇몇 간판은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봤을 때도 훌륭할 뿐 아니라 주변환경과 잘 어우러져 멋스러웠습니다.
계속 걸어서 가회동길 끄트머리 중앙고등학교 근처에 위치한 예전 회사 앞에 도착했는데 회사 건물이 리모델링 중이었습니다. 공사작업 중인 분께 여쭈어보니 전시장으로 바뀐다는군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북촌 일대의 많은 건물들이 점점 전시장이나 갤러리로 리모델링되는 중입니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계동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계동길은 작년에 같이 작업했던 일러스트레이터의 작업실을 갈 때 처음 가보았는데 대략 200미터 정도의 길에 유니크한 몇 가지의 타이포를 볼 수 있어 이번 타이포 여행 코스에 포함시켰습니다. 계동길로 접어들어 맨 처음 보이는 것은 언제쯤 개원해서 진료를 시작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병원입니다. 건물의 모양새와 손으로 직접 그려서 만들어낸 독특한 간판이 마치 근대사 드라마를 촬영하는 야외세트장에 온 듯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점점 골목 안으로 들어갈수록 오래전 서울의 모습인 듯한 건물과 간판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내부가 너무도 궁금한 30~40년쯤 돼보이는 목욕탕, 복고스타일로 인테리어된 원두커피 가게, 초등학교 시절 보았던 보물섬을 아직도 팔 것 같은 00당으로 끝나는 서점까지... 어릴 적 살던 동네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반나절의 타이포 여행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발이 덜 아프거나 무엇인가 좀 더 보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청계3가 주물공장 골목과 충무로 뒤쪽 인쇄골목입니다. 이곳은 디자이너라면 한번쯤은 가볼 만한 곳입니다. 마치 30~40년 전 서울로 돌아간 듯한 풍경과 함께 우리나라 인쇄 관련 디자인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계동 근처 지하철3호선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내려서 세운상가 뒤편으로 가면 미로같이 뚫려 있는 주물공장 골목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의 공장 간판은 마치 서울이 아닌 다큐멘터리에서 봤을 법한 제3세계 국가에 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좁은 골목 위에 주렁주렁 설치되어 있는 작은 아크릴 간판들, 각목과 함석판으로 만들어진 프레임에 손글씨로 쓰여진 간판들을 보면 북촌의 세련된 간판과 기타 타이포 요소들과는 상반된 거칠고 원시적인 공간으로 느껴집니다. 미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간판과 공간이지만 오랜 세월 때묻고 닳은 질감과 지저분해도 적재적소에 위치한 공간의 사물들이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 같습니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청계3가 주물공장 골목의 구조와 매우 흡사하지만 이곳의 타이포 요소는 버내큘러(특정문화나 지역, 집단에서 사용하는 일상언어를 의미. 미학적인 세련미는 덜 할지라도 나름의 인간미를 가진 주변환경) 디자인이 많이 보입니다. 이곳은 인쇄 관련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녀본 적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인쇄산업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예를 들면 필름출력소 간판에 항상 트레이드마크로 쓰이는 무지개색 애플파워 매킨토시 간판, 그리고 작게 쓰여진 일본식 인쇄용어 등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울의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을 타이포 여행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화창한 주말에 친구들과 함께, 혹은 연인과 가볍게 걸으면서 소개한 곳들을 살펴보면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시각적 충만감과 함께 손에 쥔 카메라 안에는 서울의 모습이 한 가득 담겨 있을 테니 분명 여러모로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