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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로 그린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다_타이포그래퍼 박우혁 조회수 16005
사람은 어떤 계기로 인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고, 사물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다. 계기라는 것은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만남이나 이별이나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자극이 어느 순간 특별한 계기가 되어 그것을 맞닥뜨린 사람을 변화시킨다.
타이포그래퍼 박우혁의 계기는 스위스에서의 유학생활이었다. 스위스에서 머물렀던 2년 동안, 그의 타이포그래피는 천 개, 만 개로 분열하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디자인 영역을 넘나들며 시선의 변화로 빚어낸 작업들은 대중의 가슴 속에서 크고 작은 울림을 만들어 냈다.

에디터 정윤희(yhjung@jungle.co.kr)


한글디자인은 크게 서체를 제작하는 부류와 만들어진 서체나 캘리그래피로 제2의 창작물을 만드는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박우혁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영화의 로고타입, 웹디자인, 광고디자인, 편집디자인까지 ‘디자인’이 따라붙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지만, 그 중에서도 영화의 로고타입과 편집디자인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왔다.
디자이너는, 특히 상업적인 디자이너는 대중 앞에 나서기가 참 어렵다. 그저 작품으로 기억될 뿐이고, 그 작품 뒤에 숨은 디자이너까지 기억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지금까지 박우혁은 대중에게 한글처럼, 만든 것과 만든 사람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한글처럼, 누구나 쉽게 접하고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는 지금껏 그래픽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영역을 넘나들며, 그 두 개의 영역이 하나인 것처럼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는데, 사실 그래픽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경계는 애매하다.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두 영역을 굳이 나눌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박우혁이 가진 또 하나의 플레이그라운드인 북디자인에서는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자’가 쓰이는 북디자인에서의 타이포그래피는 그리 쉽지 않다고 말한다. 책에는 적어도 5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서체들이 섞여있고, 그것들을 한 번에 아울러야 하는 책 표지의 타이포그래피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그는 북디자인과 영화 로고 타입에서 캘리그래피로 ‘그린’ 한글디자인을 즐겨 사용해왔다. <김선우의 사물들>, <오늘의 예술>, 영화 <밀양>, <파이란> 등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캘리그래피들은 물이 흐르듯, 산맥이 일어서듯 각각의 책마다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인다. 반면 <스위스 디자인 여행>, 월간 <인권> 등은 기존의 서체를 활용해 행간, 자간을 조절함으로써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때로는 캘리그래피로, 때로는 흔히 볼 수 있는 서체들을 조합해가며 박우혁의 색깔이 확연히 드러나는 작업을 펼쳐왔던 그에게 한글은 어떤 의미일까. 최근 디자인이라는 영역 안에서 한글을 활용하려는 사례들도 많아졌고, 한글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지만 아직 부족하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한글 서체에 대한 노력이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다지만 외국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이며, 아직도 디자이너들은 서체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안에서 문자는 헤아릴 수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디자인은 어느덧 한 나라의 문화나 정체성을 대변하기 때문에, 타이포그래피와 한글디자인에 대한 디자이너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박우혁은 “한글은 한글다워야 한다”고 말한다. 한글이 만들어진 이유와, 구조, 특징 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에 적합한 디자인 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자에 적합한 디자인 방식에 한글을 우겨넣으려 들어서는 발전도, 미래도 짚 더미 속 바늘처럼 찾기 어려워지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한글과 한글디자인에 대한 태도가 중요해진다. 태도는 ‘관점’이나 다름 없는데,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활용 가능한 방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글자를 글자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로, 의미 없이 장식적으로만 사용하려는 태도를 갖는다면 글자는 단순한 기호로 전락하게 된다.
태도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콘텐츠다. 이는 얼마나 질적으로 우수한 서체들이 개발되는가와 일맥상통하는데, 명조나 고딕과 같은 중성적인 활자를 기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디테일한 변화를 준 활자들이 개발될수록 자연스레 타이포그래피와 디자인 수준이 향상되는 것이다.
지금껏 타이포그래피에 비추어 작업해 온 그는 지금 타이포그래피 잡지 발간을 계획 중이다.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타이포그래피로 바라보는 사회를 담고 싶다고. 이 잡지가 언제쯤 세상의 빛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자꾸 기다려지는 건 박우혁이라는 필터를 거친 타이포그래피가 주는 깊은 울림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