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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디자인은 '내부의 규범 하에 장인정신에 입각한 표현을 하는 것'이다 조회수 15220
누군가 “당신이 생각하는 굿 디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뭐 이런 식상한 질문을…’ 하는 표정을 지으며, 건성으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을 주는 디자인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식상한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전율”이라고 답하면 조금 멋있어 보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전율’을 객관적으로 설명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그래픽디자인에 대해서 항상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내가 경험한 두번의 전율 중 한번을 선사한 Mr. G1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글ㅣ 성재혁, 에디터ㅣ 이상현


나: 그래픽디자인에서 ‘굿디자인’이 무엇일까요?
Mr. G1: 그래픽디자인에서 좋은 디자인은 상황에 맞는 내부의 규범 하에 장인정신(craftsmenship)에 입각한 표현을 하는 디자인입니다.
나: 으음. 장인정신은 이해하겠는데, ‘상황에 맞는 내부의 규범’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Mr. G1: 우리가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규범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지침으로 삼아야 할 규범은 다른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디자인팀 내부로부터 수립되어야 합니다. 어떤 그래픽디자인 프로젝트를 시행함에 있어서 디자인팀은 자신과 프로젝트를 둘러싼 여러 사항들을 고려하여 내부의 규범을 세웁니다. 즉, 스스로를 제약하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제약이 디자이너의 창의력을 가둔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픽 디자인을 회화가 아닌 디자인으로서 가치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지키는 규칙이 아닙니다. 이것은 클라이언트, 디자인팀, 프로듀서가 서로에게,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제한하는 사항으로서 이것이 곧 디자인의 동기(motivation)와 영감(inspiration)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그래픽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제각기 다른 내부의 규범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DNA처럼 말이죠. 그리고 그 ‘내부의 규범’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집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시각언어, 활용하고자 하는 미디어와 재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시간과 예산 등 프로젝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디자이너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간단히 말해 좋은 내부의 규범은 주어진 상황을 십분 활용해서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설계할 때 비로소 수립되는 것입니다.


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혹시, 예를 하나 들어 주시겠습니까?
Mr. G1: 좋은 예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독일에도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운을 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자칫 잘못하면 어떤 한 가지 예를 보여줌으로써 마치 ‘이것이 좋은 디자인의 표본이다’라는 잘못된 뉘앙스를 전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맞는 내부의 규범을 지키며 장인정신에 입각해서 표현하는 디자인’을 설명하기 위해 저는 두 가지 사례를 비교하여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하나는 마리안 반티예스(Marian Bantjes의 작품들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디자인한 프랙티컴(Practicum) 포스터 시리즈입니다. 마리안의 작품들은 개성이 뚜렷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형태를 디자인에 활용하죠. 그러나 그녀의 작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단지 스스로 즐기는 작업을 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녀의 모든 디자인은 매우 확고한 내부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식적인 표현으로부터 나오는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바로 마리안이 디자인 작업에 있어 스스로 설정한 규범입니다. 그녀의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이러한 규범을 철저히 따르면서 높은 수준의 그래픽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마리안의 디자인 방침은 우연히도 90년대 전반적인 시각 문화의 움직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통상적인 기업 아이덴티티 작업을 때려치운 그녀의 ‘무모한’ 방향전환은 미국의 히피 모더니즘이 엮어놓은 엉터리 규범으로부터 탈출하려는 20세기말 그래픽디자인 사회의 전반적인 의지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동시대의 그래픽디자이너들과 대중으로부터 좋은 반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작업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내부의 규범은 반드시 예술적 영감이나 표현의지에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픽디자이너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종류의 상황으로부터 동기를 부여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만든 프랙티컴 포스터 시리즈는 주변 상황의 제약으로부터 내부의 규범을 찾아낸 좋은 예입니다. 이 포스터 시리즈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제약을 영감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는 점이죠. 부족한 시간과 제한된 제작비라는 상황을 고려해 내부의 디자인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실크스크린 프린트라는 기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겠다는 내부의 방침을 확실히 따른 작업입니다.
나: 예를 들어주시니 ‘내부의 규범 하에서 장인정신에 입각한 표현’의 의미가 이해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서두르다시피 Mr. G1과의 대화를 마쳤다. 더 이상의 대화는 이제 조금 정리되는 나의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 것 같았다. 명확하게 정리되지도 않았고, 영원히 정리될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내부의 규범 하에서 장인정신에 입각한 표현’으로 내가 ‘굿 디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으로 어떤 쉬운 예를 들 수 있을까? 문득, <토마스가이드(Thomas Guide)>가 생각났다. 미국 서부의 자동차 도로망을 아주 잘 정리해 놓은 <토마스가이드>는 나의 미국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이었다. 실제로 <토마스가이드> 하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처음 토마스가이드를 접했을 때는 귀국 후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처음 경험하고 느꼈던 만큼의 감동이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이렇게 평범한 지도책이 내 뒤통수를 망치로 때리는 전율을 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나는 이 지도책이 ‘상황에 맞는 내부의 규범 하에서 장인정신에 입각한 표현을 하는’ 좋은 디자인인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토마스가이드>가 그래픽디자인이라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냥, 내 생활에 녹아있으면서 항상 정확한 정보를 주는 어떤 것이었다. 내가 Mr. G1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한가지는 지식에 의존한 까다로운 기준을 버리고 편하게 바라보면 세상에는 다양한 관점으로 즐길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성재혁은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전임강사이자 제로원디자인센터 부소장을 역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