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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은 만국 공통의 언어다, 박영하 조회수 15022
2004년 어느 날,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미국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 명함을 보고 연락을 했다고 했다. 졸업전시 당시에 학사논문을 시각화 한 전시작품과 함께 짤막한 패널, 명함 등을 비치한 적이 있는데, 나의 작업이 맘에 들어서 종합적인 포트폴리오가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회사마다 문 두드리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샘플을 놓고 다녀도 취업하기 힘든 실정에 회사 대표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은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뻤다.
인터뷰를 하고 다음날부터 인턴십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회사가 급했던지 며칠 만에 바로 정사원 채용을 제안했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기에 단숨에 입사를 결정했다. 그 회사는 맨하튼에 위치한 조나 디자인(ZONA Design)이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좋은 타이밍이었음을 부인할 순 없지만, 사실 해외 취업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가뜩이나 요즘 미국 같은 경우 최악의 경기라 사람을 뽑기는커녕 오히려 내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수한 실력과 작품의 진정성은 세계 어딜 가나 통하게 마련이다. 해외 디자인 업계의 실정과 취업 경향을 알고 준비한다면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본다.

우선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정기적인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다. 학생 뿐만 아니라 실무를 하고 있는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디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특히 해외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영문으로 된 이력서와 홈페이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메일에 첨부할 수 있는 간략한 작품 설명이 들어간 포트폴리오 PDF 정도는 항상 준비해놓을 것을 권한다.

포트폴리오를 수시로 해외 디자인 회사들에 무작정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무모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운 좋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올 수도 있다. 물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도 있지만 적어도 그 찍은 흔적들은 남기 마련이다. 국제 디자인 박람회나 해외 디자이너 초청 세미나를 공략하는 것도 방법이다. 실제로 그런 행사장에 포트폴리오를 가져갔다가 러브콜을 받아 해외 디자인 회사에 정사원으로 취업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해외 취업 전쟁터에서 가장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기는 무엇보다도 자신감이다. 유교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지만 외국 사회, 특히 뉴욕 같은 도시에서 겸손 떨고 얌전 빼다간 제 밥그릇 찾아먹기 힘들다. 동양인이라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고 기가 죽어있다면 더욱 힘들다. 최대한 자신의 실력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로 남보다 좀 튀는 행동도 용서된다. 아니 때론 도움이 된다. 입사하던 당시 와인 컬러의 모히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께서 몇 년이 지난 후 “너의 헤어스타일 때문에 첫인상이 굉장히 강렬했다. 너에게는 뭔가 있을 것 같아 보여서 뽑았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꼭 외모뿐만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의 머릿속에 ‘나’를 각인시켜줘야 한다. 디자이너는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대화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해외 취업의 또 다른 숙제는 외국어다. 미국 생활한지 6년이 되었음에도 언어의 장벽은 여전히 높다. 회사에서 유일한 한국인이고 동양인도 몇 명 없는 탓에 입사 초기에는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장 막내인데 일하다가 행여나 상사의 영어를 못 알아듣거나 실수하면 어쩌나 걱정부터 앞섰다. 학교에서든 회사에서든 언어 문제를 빨리 극복하려면 일단 외국사람과 친해지는 것이 상책이다. 공통의 화제 거리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뿐만 아니라 시시콜콜한 연예 뉴스도 좋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일 얘기도 편해진다. 취업할 때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을 뽑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비주얼로 승부하는 직업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이미지 하나가 훨씬 강하게 어필하는 법이다.
언젠가 가수 박진영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게 아니라, 세계적인 것은 그냥 세계적인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적인 무언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했던 말일 것이다. 파슨스 재학시절 느꼈던 것도 대다수의 우리나라 학생들이 디자인에 한글과 같은 한국적인 요소를 집어 넣어서 차별화를 시도했던 경우를 자주 봤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좋은 디자인은 보편성을 띄게 마련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있는 디자인이야말로 세계적인 디자인이다.

마지막으로 성공적인 취업을 위해서는 다양성을 키워야 한다. 모든 주제와 소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간혹 한가지의 스타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디자인만 하려고 고집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의 틀에 가두어 놓는 것과 같다. 그들에게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어떤 것을 던져줘도 디자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진정 준비된 디자이너이며 사회가 원하는 디자이너다.


| 박영하 |
삼성디자인학교(SADI)와 뉴욕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2004년 맨하튼의 조나 디자인(ZONA Design, Inc.)에 입사하여 현재까지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뉴욕의 보물창고>가 있으며, 현재 동아일보에 ‘뉴욕 리포트’라는 칼럼을 기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