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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따위 버리다, 뉴욕 맨땅에 헤딩하다, 장호석 조회수 15566

영어 실력이 ‘젬병’이었던 도미 초기, 배가 고파 찾아간 햄버거 가게에서 20불짜리 지폐를 내밀며 “I’m very hungry”를 수줍게 말했던 한국 청년은, 현재 ‘Director of creative designer’라는 직함을 달고 뉴욕 맨하튼 거리를 당당히 활보하고 있다. 가끔은 인사동 부산식당의 생태찌개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면서….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공모전 수상이나 특별한 경력도 없이 그저 무던하게 대학(인덕대학 시각디자인과)을 다녔다는 장호석. 그의 뉴욕 입성은 스스로도 ‘뜻밖’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어느새 여느 동기들과 마찬가지로 살벌한 취업 전장에 서야 했던 졸업반 시절, 지인의 권유로 얼렁뚱땅 두 달간 준비를 마친 뒤 훌훌 국경을 넘게 됐다는 것. 한국 땅은 단 한번도 떠나본 적 없으며 영어 실력도 ‘젬병’이었던 서울 촌놈에게 당시의 미국행이란, “인생 계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이따금씩 막연히 꿈 꿔보는 춘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모두들 발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미국 비자를 손에 쥐고서도, 주머니에는 단돈 100만원이 든 채로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조차도,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스물 여섯 청년이 기회의 땅 미국에 발을 디뎌 가장 처음 맡은 일은, 골프 공을 포장하는 소일거리였다. 아마도 그때 장호석은 도시 뉴욕의 냉험한 실체를 피부로 체감했으리라. “디자인 실무를 바로 맡기에는 영어 실력이나 디자인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일주일 만에 마치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회사를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 디자인을 찾아 떠나온 뉴욕 땅에서, 정작 디자인과 떠나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게 무척이나 싫고 힘들었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뉴욕 땅에 당도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기회를 만들기 위해 맨땅에 헤딩하듯 직접 부딪쳐야 했다. “무작정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들고 뉴욕의 한인신문 사에 찾아갔다. 다행히 그곳에서 광고 디자인 작업을 맡아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그때 영양가 없는 자존심, 막연한 기대와 동경은 버렸다. 이곳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어야 하는 냉정한 곳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활고에 좌지우지 되는 꿈이라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호석은 다시 한번 맨땅에 헤딩하듯 도전장을 내밀었다. 재취업에 도전했고, 결국 지금 근무하는 ‘윙키 아일랜드(Winki Island)’에 정착할 수 있었다.


막상 취직을 해서 보니 ‘윙키 아일랜드’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회사였다고 한다. “입사 당시 그래픽디자이너가 나 혼자였다면 그 규모가 어떨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실망하거나 주눅들기는커녕 기꺼이 받아들였다. 전공을 살려 그래픽디자인 실무를 담당할 수 있었고, 특히 도맡았던 수영복 텍스타일 디자인이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이 곳 뉴욕에서는 수영복도 엄연히 하나의 패션으로 각광받은 지 오래다. 이미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수영복 디자인 분야에 뛰어들어 뜨거운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뉴욕이었기에 나 또한 이를 ‘그저 그런’ 디자인 분야라고 일축하지 않고, 재주와 기량을 최대한 뽐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도전은 현실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3년 만에 회사에서 그 실력과 역량을 인정받아 디자인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Director of creative designer’라는 직책을 맡게 것이다. 불과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에 이뤄낸 성취였다. “실력이 없으면 금새 도태되고 버려지는 곳이지만, 실력을 인정받으면 나이와 경력, 학벌 등은 상관없이 기회가 쥐어지는 곳이 바로 뉴욕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건축가 자하 하디드와 라코스테의 콜라보레이션 라인을 위한 광고 디자인 작업 등 프리랜서로서의 활동도 활짝 기지개를 폈다. 미국 생활의 제 2장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장호석은 ‘금의환향’을 꿈꾸지는 않는 것일까. “아직 한국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올 여름에는 ‘HO’라는 이름을 걸고 작은 갤러리에서 디자인 전시를 할 예정이기도 하다. 아직 디자인 컨셉트가 확실히 나온 것이 아니지만 분명 ‘즐거운 전시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사 업무와 프리랜스 작업을 병행하며 올해는 꼭 대학에 입학하고 싶다. 또 맨땅에 헤딩을 하는 거다(웃음).” 소설가 전경린은 삶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공기 속에 자신을 놓아야 하는 것, 그리고 삶을 신뢰하며 순간의 등을 올라타고 달려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물과 바람이 모래알을 실어 나르듯 어쩌면 운명이 그를 뉴욕으로 실어 날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호석을 삶과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며 기회의 등에 머뭇거림 없이 올라탔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앞을 향해 달렸다. 기회는, 스스로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이라고 장호석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