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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찾아서 지도 밖으로 행군하다, 김영나 조회수 16906

찬 공기에 슬며시 도시가 얼어붙던 지난해 말, 갑작스러운 추위에 두꺼운 가죽 재킷을 입고 나온 에디터 앞에 야구 점퍼를 세 개나 껴입은 여자가 부들부들 떨며 앉아있다. 세 겹 야구 점퍼 아래로 밑위가 무척이나 긴 보라색 배기 팬츠를 입은 채, 짧디 짧은 숏커트를 연신 쓰다듬는 그녀는 누가 봐도 분명 ‘이국적’인 모습이다. 타이포그래피 공방 WT(Werkplaats Typografie)의 10주년 전시 ‘Starting from Zero’ 전을 위해 3년 만에 고국 땅을 찾아온 김영나를 만났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2006년, 김영나는 모든 것을 접고 네덜란드 아른헴으로 떠났었다. KAIST 산업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안그라픽스와 N4 크리에이티브 그룹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했으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디자인을 찾아서 다시 학업의 길에 올랐던 그녀. 네덜란드의 중소도시 아른헴에 위치한 WT는, 당시 김영나가 입학을 희망하는 대학원 목록에조차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여행 삼아 찾았던 그곳에 눌러 앉게 된 이유는, 12명에 불과한 전교생이 점심시간이 되자 도란도란 모여 밥을 먹는 가족적인 분위기와 밤을 새워 개인 작업에 몰두하는 열정적인 작업 환경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수 격인 4명의 튜터는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과 대화를 통해 조언해주는 조력자로 그 역할을 축소하고 있었다. “조언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진행해 결과가 좋으면, 선생님들은 네 생각이 옳았다고 인정해주는 곳이 WT지요.”


게다가 WT는 꽉 짜여진 커리큘럼이 없는 열린 학교 기관인 동시에, 학생들이 대뇌외적인 프로젝트에 자체적으로 참여하고 진행할 수 있는 디자인스튜디오이기도 했다. 따라서 김영나는 학생이자 프리랜스 디자이너로서 WT를 통해 다양한 실무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 말도 통하지 않는 동양인 여자가 클라이언트와 직접 대면하고, 심지어 제작 공장을 찾아 다니는 등 디자인이 완성되는 전 과정을 직접 해결해야 했다. ‘네덜란드 패션 & 디자인센터(Dutch Fashion & Design Center)’의 아이덴티티, 강연프로그램 ‘Women Speak!’의 아이덴티티와 플라이어, ‘파이든 그래픽 클래식(Phaidon Graphic Classics)’의 편집 디자인, ‘오쎄 예술 재단(Oce art foundation)’의 전시 디자인 등이 바로 프리랜스 디자이너로서 김영나가 참여한 작업이다. 또한 실무 디자인은 물론 개인 프로젝트 역시 균형을 맞춰 진행했는데, ‘우물 우물 vol.8(umool umool vol.8)’과 ‘스티커 포스터 시리즈(Sticker Poster Series)’, ‘타입과 건축(Type and Architecture) 등을 마무리했다. 김영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스스로의 디자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한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쳇말로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 ‘특목고’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녀는 디자인을 향한 꿈으로 산업디자인학과를 지원했지만, 당시 디자인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되려 디자인을 둘러싼 것들에 연연하는 분위기에 적지 않은 실망을 했다고 한다. 학생 시절, 제품 목업(mock-up)보다는 그것을 설명하는 인쇄물 제작이 더 즐거워 그래픽 디자인을 해보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주위의 반응은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려고 하냐”, “차라리 아트를 해 보라”는 등 오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가보는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그래픽디자인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꿋꿋이 걸어왔던 길이 결국 하늘을 날아 국경을 넘는 머나먼 여정이 될 지는 몰랐다. “네덜란드에서 지내면서 생각하게 된 점인데, 디자인에 사람이 만든 따듯한 함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량 생산을 통해 많은 것들이 우리 주변을 채워가지만,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의 디자인, 디자이너가 만들면서 즐거웠으리라 짐작이 되는 디자인, 그렇게 따듯함이 베어있는 디자인을 지금 찾고 있어요.” WT를 통해 커리어를 쌓고, 현재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프리랜스 그래픽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김영나는 앞으로 디자인을 찾아서, 나를 찾아서 또 어딘가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