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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디자이너 줄리엔 벨리에 조회수 16194


책상머리에 앉아 꼼지락꼼지락 종이를 접고 오리고 붙이던 어린 시절, 어쩌면 우리는 그 색색의 종이들이 만들어내는 저 너머의 세상을 몰래 훔쳐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빨주노초파남보로 넘실대던 호기심 천국…. 스물 일곱 살 청년 줄리엔 벨리에(JULIEN VALLÉ E)는 우리가 접어 버리듯 잊고 있던 그 세상을 다시 눈앞에 펼쳐 보인다.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숫제 포토샵인 줄 알지만
이미 보름 전부터 새끼 손가락을 걸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만남이다. 작년, 시각디자인 분야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뉴욕 아트디렉터스클럽(ADC) 어워드에서 ‘영 건(YOUNG GUNS)’ 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줄리엔 벨리에. 삼원페이퍼갤러리의 5주년 개관기념전시 ‘디자인, 경계를 넘다’를 위한 그의 방한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잡았던 인터뷰다. 고백하자면, 작업 스토리보다는 줄리엔 벨리에의 얼굴이 내내 궁금했다. 작품 속에서 그가 얼굴을 감춘 채 후디를 뒤집어쓴 뒤통수, 바닥에 널브러진 하반신 등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으로 종종 등장해왔던 까닭이다. 결국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까 무척 궁금했었어요”라는 썰렁한 말로 이 고대했던 인터뷰를 시작하고 만다. “한국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을 ‘꽃미남(flower guy)’이라고 불러요.”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파란 눈의 청년이 웃으며 대답한다. “좋은 말인가요?” 아무렴 그렇고 말고. “고마워요.” 다행히 ‘천만에요’ 소리를 입 밖에 나오려는 찰나 그가 말을 가로챈다.




“사실 작품 속에 굳이 제가 등장하는 이유는, 작품의 크기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도록 알려주려는 장치인 셈이에요.” 그도 그럴 것이, 인쇄물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만 확인하자면 줄리엔의 이 덩치 큰 작품들이 종이 학처럼 작아 보이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그깟 크기야 대수롭지 않다. 되려 ‘수작업’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준 것만으로 줄리엔으로서는 천만다행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작업을 숫제 ‘포토샵’의 결과물로 오해한다는 것.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례로 에디터조차 그가 제작한 ‘MTV’ 광고 비주얼을 보고서 테크닉과 컬러감이 뛰어난 3D 그래픽디자이너의 솜씨로 알았으니까. 하지만 줄리엔 벨리에는 지금껏 청동과 주철로 조각품을 만들 듯 종이를 접고 오리고 붙이며 설치 미술에 가까운 그래픽 작업을 일관되게 선보여왔다. 자칭 ‘종이 조각’이라 일컫는 일련의 작품들은 답답하다 싶을 만큼 수공예적인 방식을 고집한 결과물이다. 주목 받는 신진 그래픽디자이너라고 하기에는 꽤 낯설고 특별하게까지 느껴진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
대학 시절부터 그는 남달랐다. 뻑적지근하게 화려한 그래픽 이미지를 자랑하던 또래 친구들의 졸업 작품 사이에서, 마치 시위를 하듯 생활 용품을 열 맞춰 진열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프린트한 현수막을 보무도 당당히 전시회장에 걸었다(훗날 이 졸업 작품은 ‘버전 업’ 되어 유명 매거진인 의 커버를 장식한다). “이게 뭐야, 너 그러면 안돼” 하는 친구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외골수처럼 이 아날로그적인 작업 방식을 놓지 않았다고.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고 마우스로 얹기만 하면 완성되는 글자조차 줄리엔 벨리에는 일일이 종이를 자르고 붙여가며 만들어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애늙은이 같은 꼬장꼬장함이 어느 정도냐 하면, 마치 폭죽이 터지듯 종이 가루가 분분히 날아가는 컷(영국 판 <엘르>)은 합성이 아니라 그 종이 하나하나에 낚싯줄을 연결해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뉴욕 타임즈 매거진>의 4초짜리 타이틀 영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넉 달을 꼬박 공들이는 고집불통 작업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예스러운 느낌을 찾아볼 수 없는 젊고 세련된 시각적 완성도. 어쩌면 그의 작품을 보고 “어머” 하는 감탄사가 터지는 이유는 오랜 시간 끈질기게 매만졌을 고집과 수고, 거기에 녹아 있는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혼이 없다며 불구덩이에 작품을 던져버리는 식의 고리타분한 예술가 타입과는 전혀 상관없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 과정이 단지 즐거울 뿐이다. 지극히 노동집약적인 작업 스타일을 고수하는 까닭을 묻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컴퓨터가 싫었어요. 책상에 앉아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봐야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종이는 일단 싸고, 특별한 기계나 기술도 필요 없잖아요. 어린 시절 그랬던 거처럼 마음대로 오리고 붙이면 되니까요. 틀렸다고 ‘undo’ 키를 눌러서 재생할 수도 없는 과정, 그렇게 종이와 대화하는 과정이 좋아요.”





줄리엔의 이 작업 스타일은 주종목인 ‘모션 그래픽’에서도 어김없이 계속된다. 그에게 ‘쿽 ’이나 ‘애프터이펙트’는 알고 있으나 모르는 이름일 뿐. 주로 사용하는 촬영 방식은 고작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사물을 1인치씩 옮기고 촬영하는 과정을 수천 번 반복함으로써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촬영 방식 말이다. 이도 아니면 입으로 “슈우웅” 소리를 내며 장난감비행기를 공중에 날리는 어린애처럼 이미지 소스를 손으로 붙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게 고작이다. 이 무식하리만치 단순하게 촬영된 영상 위에 얹어지는 그래픽 효과 역시 <용가리>의 심형래 감독이 본다면 콧방귀를 뀔 것들이 대부분이다. 콘솔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유치한 이미지이지만 오히려 줄리엔의 영상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완벽한 조화를 이뤄낸다. 화려한 테크닉으로 진귀한 볼거리를 만들어내느라 고심인 여느 모션 그래픽 디자이너들과는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줄리엔 벨리에. 그런 채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디자이너로서 2009년 현재 손꼽힌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진짜라니까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 아날로그적인 그래픽디자인이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의 판타지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에디터는 그 판타지가 <용가리>보다 더 그럴싸한 환상을 연출한다고 생각한다. 줄리엔 벨리에의 작품 내용은 결국 ‘초현실’이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웹사이트가 물처럼 토해지고, 책갈피 사이에서 종이 조각이 벚꽃잎처럼 공중 부양하고, 편편한 종이를 뚫고 집이 세워지고 무지개가 뜨는 거짓말이다. 실제 생활에서는 이뤄지지 않을 판타지이지만, 그것이 손으로 만져지는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신기하게도 그 자체로 진실처럼 다가온다. 예를 들면 이런 공식이 가능하다. 살인 사건이 진실로 판명되기 위해서는 물증과 증인이 필요한데, 줄리엔 벨리에의 판타지가 사실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세계가 종이라는 물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 즉 줄리엔 벨리에는 그 세계를 목도한 증인으로서 이미 서있으니까 말이다. 다른 근거로, 줄리엔 벨리에가 얼굴도 없이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또 다른 이유를 대본다. “텔레비전 위에 스푼이 있다고 생각해봐요. 식탁이 아니라 텔레비전 위에 놓인 스푼은 특별한 게 아닌데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지요. 자연스럽게 어떤 이야기가 상상되는 거에요. 마찬가지로 작품 곁에 사람을 세워둠으로써 뭘까 하는 호기심을 야기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