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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의 범람과 표현의 위기 조회수 15207


카페가 있다. 노출 콘크리트공법으로 만들어진 벽면에는 사진이나 그림 같은 것이 어지러이 붙어있다. 원목테이블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고, 의자는 똑같지 않은 것들이 섞여서 배치되어 있다(브랜드는 ‘이케아’가 적당하다). 노트북을 가져와서 작업하는 이들을 위한 콘센트가 자리마다 하나씩 있고, 커피는 직접 로스팅을 하거나, 로스팅 한지 얼마 안 된 신선한 원두만을 사용한다. 에스프레소만 있는 경우도 많지만 대세는 핸드드립이다. 브라질, 이디오피아,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등지서 공수되어온 원두들이 열을 맞춰 진열되어 있다. 노래는 잔잔한 시부야케이, 소울, 재즈, 홍대발 인디음악 같은 것들이 좋다(최신가요모음은 안 된다). 마지막으로 책꽂이에 몇 권의 책(미술, 사진, 패션잡지, 커피, 자기계발서, 베스트셀러 소설 등이 적당하다)을 꽂아놓으면 하나의 카페가 완성된다. 이름 하여 “홍대 카페”다.(카페 앞에 주차되어있는 예쁜 자전거는 서비스)

글│최태섭 칼럼니스트( curse13@nate.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홍대 앞에는 어머어마한 숫자의 카페들이 존재 한다. 가끔은 ‘혹시 이 동네 사람들은 옷 사고, 커피 마시고, 술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게다가 이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문자 그대로 ‘주택가’였던 곳에도 어느새 1층을 차지한 카페들이 속속들이 등장 중이다. 뿐만 아니다, 서울의 변방이었던 은평구에도, 부천에도, 군산의 시내에도, 대구에도, 부산에도 홍대풍의 카페가 속속들이 출몰 중이다.

사실 카페뿐만이 아니다. 홍대는 오늘날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문화적’ 장소다. 패션, 음악, 놀이, 디자인, 미술 등등. 덕분에 주말의 홍대는 원래대로라면 ‘신촌’으로 갔어야 할 상당수의 인구를 흡수해 대 성황을 이룬다. 원래 인사동이나 이태원 같은 곳으로 몰리던 외국인 관광객들도 점차 홍대로 쏠리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나이트클럽이 입성하는 바람에 홍대 거리에서는 밤마다 호객행위와 실랑이가 끊이지를 않는다. 술 취한 외국인들과 벌어지는 시비도 이젠 일상적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탓에 토박이들은 불만이 많다. “홍대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내가 처음으로 이 환상의 땅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 10년 전에도 들려왔던 소리다. 주말의 홍대는 원주민들의 기피대상1호다. 그들은 사람이 적은 평일이나, 아니면 자신만이 알고 있는 깊숙한 구석의 가게로 숨어들어간다. 그마저도 불만인 사람들은 아예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홍대는 범람하는 만큼이나 농도가 옅어지는 중이다. 덕분에 식별 역시 어렵다. 홍대에서의 패션과 외양은 애초에 놀랄 만큼의 ‘이념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홍대풍의 패션이 존재할 뿐이다. 힙합도, 펑크도, 빈티지도, 레트로도 더 이상 그 사람에 대한 식별기호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어쩌면 홍대는 그 존재 자체가 한국사회에 던지는 미적 발악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홍대는 더 이상의 변별력을 가지지 못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에 녹아 들었다. 단순히 “홍대가 변했다”는 동네꼰대같은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미학이 줄 수 있는 충격이 과연 아직 남아있는가의 문제다. ‘상업화’를 지적하는 것은 안 하느니만 못한 얘기가 되겠지만, 이 ‘전형화’는 홍대라는 장소가 가졌던 문화적 맥락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남과 다르게 살겠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염원들이 시청각적인 문화들을 통해 드러났을 때 그것은 충격과 진보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5일장에서 사 입은 것 같은 몸빼바지도, 스키니진도, 배기팬츠도 ‘의미 없음’의 영역에서 함께 뒤섞인다. 물론 의미 따위 없으면 어떠냐며 쿨슄하게 무시할 수도 있다. 이미 이 반응마저도 이젠 진부하다. “홍대는 진즉에 끝났어! 그러니까 이 X 같은 홍대패션이나 많이 사가라고!?”

물론 시각적, 청각적 ‘표현’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은 여전히 엄청나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화려하고도 끝없는 실천들이 이미 지천에 널려있는 오늘날에는 단순히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고민만으로는 부족하다. 남과 다르게 보이는 1001가지 방법에 하나쯤을 더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거나 미미할 뿐이다. 이럴 때 일수록 한번쯤은 숨을 고르며 이 화려한 표현의 방식들이 드러내거나, 숨기고 있거나,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의미”들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그다지 쿨하지도, 심플하지도 않은 작업이다. 때론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정치”같은 망령들을 불러내야 할 때도 있다.

이 구질구질하고 먼지 쌓인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예술이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사실은 굉장히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모든 이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존재하고 있다던 칸트의 주장은, 아름다움이야말로 얼마나 이해관심과 밀착된 영역인가를 보여준 수많은 연구들에 의해 꽤나 성공적으로 반박되었다. 아름다움은 지독히도 사회적인 분할선을 따라 나뉘고, 조정되고, 관리되고, 검열된다. 요컨대 아름다움은 곧이곧대로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이러저러한 우회로와 필터를 거쳐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앞으로 일련의 글들을 써나갈 이유이자, 목적이며, 전제이다. 사물들과 사변들과 표현들을 비틀고, 비스듬하게 바라보고, 그 배후를 추적함으로써 새로운 맥락 속에서 재배치하는 일.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대지는 우리의 발 밑에서 다시 한 번 불안하게 꿈틀거릴 것이다.”라고 썼다. 나의 계획 역시 비슷하다. 표면들은 우리의 눈앞에서 다시 한 번 기이하게 일그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