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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자인은 욕망의 대상이어야 한다 조회수 21342

초현실주의 디자인 100년

 

사람들은 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할까? 엉키고 꼬여있는 우리 마음속을 직시하고 해소하면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고 외적 문제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초현실주의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큰 미술사조 가운데 하나였다. 초현실주의 예술은 ‘꿈(dream)’이라는 알쏭달쏭한 무의식의 세계를 다뤘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보고 스쳐간 사물이나 순간들은 우리가 잠든 사이 꿈이란 또 다른 의식세계를 통해 전혀 상상치 못한 색다르고 생경한 맥락과 상황에서 재등장한다는 사실을 시각예술로 표현해 낸 미술 운동이 바로 초현실주의다.

 


초현실주의 사진가 만 레이(Man Ray)의 <마들렌느 비오네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꿈꾸는 모델> 1937년 작. 의자는 초현실주의 디자이너 오스카 도밍게즈(Oscar Dominguez)가 디자인한 <브루에뜨>로, 손수레라는 평범하고 소박한 ‘발견된’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디자인에 도입한 예다. Man Ray Photo Library/Telimage, Paris ⓒ Man Ray Trust, Paris/VG Bild-Kunst, Bonn 2019

 

 

우리가 현실에서 보고 접한 사물과 상황은 꿈속에서 어울리지 않을 듯한 얼토당토않은 것들과 함께 등장하여 꿈에서 깨어난 인간의 마음을 온통 혼란스럽고 의아하게 만든다. 지금부터 약 100년 전, 유럽에서는 일군의 호기심 많고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이 같은 인간 보편적 정신 현상을 미술의 영감으로 포착하고 ‘초현실주의(surrealsism)’이라 이름한 새로운 미술 운동을 일으켰다.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2019년 9월 초현실주의 운동이 디자인에 끼친 효과를 조명하고 지난 100년 동안 그 두 분야 사이를 오간 창조적 대화와 결과물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욕망의 대상전’을 선보인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회화작품 <풀 수 없는 5미터짜리 부속물이 달린 날아가는 거대한 모카 컵> 1944~45년 작. ⓒ akg-images, copyright for the works of Salvador Dalí: ⓒ Salvador Dalí, Fundació Gala-Salvador Dalí/VG Bild-Kunst, Bonn 2019

 

 

미술사는 초현실주의의 탄생년을 1924년으로 잡는다. 당시 프랑스에서 작가, 예술가,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던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양차 세계대전 사이 경제공황, 도시화, 근대화라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당시 20세기인들을 강박적으로 사로잡았던 집단적 불안감, 집착, 우연, 설명하기 어려운 비합리성, 황당무계한 꿈속 세계를 시대적 정신 현상으로 보고, 이를 예술, 패션, 사진,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미학으로 표현해 보자고 제안하며 초현실주의 예술운동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스위스 출신 여성 초현실주의자 메레 오펜하임(Méret Oppenheim)이 디자인한 <새 발이 달린 테이블(Table with Bird’s Feet)> 1939년 ⓒ Vitra Design Museum, photo: Andreas Sütterlin, copyright for the works of Meret Oppenheim: ⓒ VG Bild-Kunst, Bonn 2019

 

 

그의 선언은 당시 한창 부흥하던 상업 디자인계도 설득시켰다. 당시 파리와 런던 패션을 선도하던 <하퍼스바자(Harper’s Bazaar)>와 <보그(Vogue)> 패션지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을 표지기사로 소개하고 초현실주의가 표방하는 환상적 자유분방함과 기괴망측한 이미저리의 묘한 ‘섹시’함을 반겼다. 곧 초현실주의적 성향이 반영된 미술작품과 장식품은 ‘욕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주의 회화,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색 모 델>(1947~48년)과 살바도르 달리의 <날아가는 거대한 모카 컵>(1944~45년)은 컬트적 위상을 차지한 걸작 회화가 됐고, 화가 막스 에른스트, 설치미술가 마르셀 뒤샹, 사진가 만 레이는 전에 없던 저마다의 기괴한 이미지로 미술평론계를 뒤흔들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디자인한 구두 모자(Shoe Hat)을 쓰고 있는 살바도르 달리의 둘째 아내 갈라 달리(Gala Dalí)의 모습. 1938년 ⓒ Salvador Dalí, Fundació Gala- Salvador Dalí, photo: André Caillet/VG Bild-Kunst, Bonn 2019

 

 

사실 1920~1950년은 유럽의 예술인들에게 유럽 대륙은 상상치 못한 ‘초현실적’ 상황이 펼쳐진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고 난 후 유럽인들은 전쟁의 후유증 속에서 경제적 불황을 면치 못했고, 사회 부조리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 나치주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 나치주의의 확산과 프랑스 점령 이후 수많은 근대 예술가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것을 계기로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 초현실주의가 대유행기를 맞았다.

 


르 코르뷔지에가 한 초현실주의 미술 컬렉터의 주문으로 디자인한 펜트하우스(파리) 실내장식은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1929~31년(지 1936년 3월호 게재) ⓒ Vitra Design Museum, copyright for the works of Le Corbusier: ⓒ F.L.C/VG Bild-Kunst, Bonn 2019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오존 제3번> 실내장식용 조각. 1962년 ⓒ F.L.C/VG Bild-Kunst, Bonn 2019

 

 

사상과 정치가 극단화를 이루는 가운데 브르통과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세상만사는 우연과 사고의 연속 속에서 이어지는 부조리에 불과하다고 본 정치적 반정부주의(anarchism) 노선을 택했다. 경제 불황이 더 노골화된 1930년부터는 엄격한 모더니즘에 따라 디자인해 오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조차도 일부 고객의 주문에 응해서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영향받은 건축을 창조했다. 그에게 건축 의뢰를 했던 당대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미술 컬렉터 카를로스 데 베이스테귀(Carlos de Beistegui)의 파리 펜트하우스 아파트 실내장식은 보기 드문 르코르뷔지에의 초현실주의풍 건축 사례다.

 

여배우 메이 웨스트(May West)의 얼굴을 초현실주의 아파트 인테리어 장식에 활용한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1934~35년 작 ⓒ bpk/The Art Institute of Chicago/Art Resource, NY, copyright for the works of Salvador Dalí: ⓒ Salvador Dalí, Fundació Gala-Salvador Dalí/VG Bild- Kunst, Bonn 2019 

 


스튜디오65가 달리의 메이 웨스트에서 영감받아 디자인한 빨강 입술 모양의 <보카(Bocca)> 소파. 1970년 ⓒ Gufram/Studio65, photo: Jürgen HANS ⓒ Vitra Design Museum

 

 

그러나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정신과 정수(整數)는 인가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사랑-에로티즘-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recognition)-탐험(exploration)-전복(subversion)을 미술과 디자인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다. 칼르로 몰리노가 디자인한 살바도를 달리의 <메이 웨스트 입술 소파>(1938)는 이후 이탈리아의 급진 디자인 단체 스튜디오65가 <보카>(1970)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키며 여성의 풍만한 입술이라는 영원한 섹스심벌을 한 편의 가구 디자인 아이콘으로 길이 남겼다.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전복적으로 활용하는 콘셉트는 초현실주의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대표적인 현대 독일 디자이너 콘스타틴 그르치치(Konstantin Grcic)의 <옷걸이 솔(Coathangerbrush)>(무인양품 에디션), 2002년. Courtesy of Ryohin Keikaku Co., Ltd. 

 


댄 토빈 스미스(Dan Tobin Smith) <관점의 문제(A Matter of Perspective)>(2004년 6월호 Wallpaper(69호) 게재, set design by Lyndsay Milne McLeod) ⓒ Dan Tobin Smith

 

 

초현실주의 미술과 디자인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심리분석학 이론에 기초한다. 인간이 내면에 간직한 사랑과 에로티즘을 향한 욕망은 복잡한 문명사회와 문화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인간이 지닌 저급하고 충동적인 본능들 - 예컨대 폭력, 억압, 파괴에 대한 욕망 - 을 억누른 결과 불거진 때론 추하고 때론 변태적인 에너지의 발산이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1980년대에 이르러 유럽과 미국의 디자이너들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 Lévi-Strauss)의 ‘야생의 사고(Savage Mind)’ 콘셉트로부터 영향을 받고, 디자인 아이템 고유에 전통적 형태와 기능 사의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한 ‘하이브리드’적 접근을 실험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전개시켰다.

 

잉고 마우러(Ingo Maurer)의 <이런 불상사가!(Porca Miseria!)>는 여리고 귀한 식기가 와장창 깨지는 악몽과도 같은 한순간을 공중에 얼어붙은 듯 불멸화시킨 조명 디자인이다. 1994년 작 ⓒ Ingo Maurer GmbH, München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지는 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무서워하는 꿈이다. 악몽을 유머러스하게 재해석해 불안과 긴장을 해소한 디자인 그룹 블레스(BLESS)의 작품 <헤어브러시(Hairbrush)> 1999년 (2019년) ⓒ Vitra Design Museum, Photo: Andreas Sütterlin

 

이탈리아 디자이너 알도 투라(Aldo Tura)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것은 파이크가 아니다>(1926년)에서 영감받아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구현한 <파이프(La pipa)> 1960년 경 작품 ⓒ Vitra Design Museum, photo: Andreas Sütterlin

 

 

예술과 인생, 현실과 가상세계란 결국 어디엔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 꿈과 환상의 세상, 그 어느 즈음에 있을 성싶은 숨겨진 무의식의 세상은 아닐까? 초현실주의는 인간의 정신활동, 사상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하고 묘사하는 세계관이자 예술적 표현방식이다. 현실과 정해진 창조적 과정에서 벗어나 예술작품이란 예술가에게 환상의 자유를 허락해 줬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들에게 디자인이란 잘 작동해야 하는 기능물이어야 한다는 바우하우스 전통의 기능주의 도그마로부터 해방시켜준 사조도 다름 아닌 초현실주의였다. <욕망의 대상(Object of Desire)>전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Vitra Design Museum)에서 2020년 1월 19일까지 열린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디자인컬럼니스트(jina@jinapark.net)

출처_ 디자인정글(https://www.jungle.co.kr/magazine/20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