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정글 특별초대석] 평생 미디어 디자인 현장을 지켜온 1세대 편집디자이너, 조의환 | 조회수 | 2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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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환은 한국 편집디자인 분야 1세대로 한국 편집디자인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1981년 월간 <마당>을 통해 본격적으로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동아일보의 월간 <멋>, <음악동아>의 창간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월간조선> 리디자인과 <가정조선>의 창간 아트디렉터를 맡았고, 조선일보 출판국 미술부장,
조의환 디자이너
조선일보는 주요 일간지 중 마지막까지 세로쓰기를 유지했었고 따라서 가로짜기로의 변화는 가장 늦은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전용 서체 개발에는 조선일보 디자인연구소와 편집디자인 전문회사와 서체개발사의 참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신문디자인에 최초의 디자이너 집단의 주도적 참여라는 점에서 디자인사에 의미가 있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전용 서체 개발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경영진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조선일보의 본문 서체 개발은 납활자시대부터 오래도록 이어져 온 조선일보 서체개발 역사를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환경에 가독성 높고 기존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는 최적의 서체를 개발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생산방식의 변화(좁은 의미의 조판방식의 변화)는 신문과 같은 속보성 매체에는 편집 제작 시간의 단축과 통일성을, 독자에게는 가독성 높고 미려한 지면을 제공하는 품질 향상이 목표여야 한다.
조선일보 1면 가로짜기 전과 후
1987년 7월호 <월간조선> 표지
조의환은 납활자 - 사진식자 ? 전산사식 ? CTS로 이어지는 조판방식의 격변기에 잡지 아트디렉터로 일하며 생산방식의 변화를 시도하였고 전통의 시사교양지 <월간조선>은 언론자유의 물결을 타고 심층취재, 탐사보도 등으로 면모를 일신하여 시사 교양지로는 획기적인 45만부의 판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전에 없던 방식인 이복식 선생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지를 디자인함으로써 시사교양지의 표지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아! 고구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였지만 전시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여러 대규모 전시를 기획,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 고구려’(국립현대미술관), 정부수립50주년기념전 ‘우리들의 이야기’(예술의전당),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전쟁기념관), ‘엄마 어렸을 적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현대사와 관련된 여러 대형 전시를 기획, 연출했다. 그가 선보인 전시들은 입체적인 연출로 전시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새롭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
조의환 디자이너가 찍은 제주의 풍경
그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제주에 터를 잡기도 했던 그는 ‘주(主)로서의 시선’을 통해 제주의 다른 풍경을 보았고, 오름, 들판 등 제주 곳곳을 살피며 농부와 자연이 대지에 연출해 놓은 그림을 사생하듯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이러한 사진은 조선일보에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연재가 되었다. 그의 입체적인 디자인, 변화를 이끄는 디자인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특별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마당, 멋, 음악동아, 월간 멋, 월간조선, 가정조선, FEEL, 조선일보 등 평생을 활자매체를 떠난 적 없는 그는 현재 사진가인 동시에 여전히 책을 디자인하는 현역 디자이너다. 오랜 시간 비정치적인 인권단체의 활동을 돕는 디자인 재능기부도 해오고 있다.
조의환 디자이너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졸업했고, 동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수료했으며,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출판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희성산업(엘지애드)을 시작으로 홍성사, 희명기획에서 광고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지낸 그는 방일영문화재단 한글글꼴지원사업을 창안, 본문용 글꼴 개발자를 후원하는 일을 해왔다.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디자인 전문회사 ‘design 54’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탈북자 지원, 북한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사)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아시아지역의 여성과 아동 인권 신장을 위한 휴먼아시아 고문, 여러나라 인권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설립한 전환기정의 워킹그룹 자문위원, 세계 80여 대학이 회원으로 있는 실크로드대학연맹 고문을 맡고 있다. <사진예술>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한 그는 지금까지 6번의 개인전 및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고, 두 권의 사진집과 한권의 사진 에세이집을 냈다. 신문협회상(가로쓰기 신서체 개발 연구 공로, 신문협회 1999년), 자랑스러운 홍익시각디자인 상(시각디자인과 60주년 기념 제1회 수상자, 홍익대학교 2023년)을 수상한 바 있다.
Q. 평생을 미디어 디자인 현장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셨다.
Q. 잡지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당시엔 외국 디자인 잡지 정기구독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편지를 보내 인보이스를 받고 외환은행 본점에 가서 무역외지급인증 허가를 받아 전신환을 항공우편으로 보내면 잊어버릴 만할 때쯤 책이 왔다. 월급 받아서 상당한 비용을 책 사보는 데 쓸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잡지가 참 끈질긴 인연이자 운명이고 선생이나 다름없다. 정치적 격변기에 대학 생활은 휴교령 등으로 제대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에 나와보니 배운 게 없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운 좋게도 국가 경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수월하게 취직도 하고 분에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음악동아> 창간호
<월간 멋> 창간호
Q. 여러 잡지를 창간 했다.
Q. 이후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신문을 디자인하게 됐는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최대 발행부수와 영향력의 신문을 리디자인한다는 것은 디자인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97년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자를 옮겨 편집위원으로 조선일보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리디자인을 한다고 전통과 수많은 애독자들의 익숙함을 한순간에 버릴 수는 없었다. 갓을 쓰고 다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힙합모자를 쓰고 다니라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른바 연착륙이라는 선택이 불가피했다.
과감한 디자인적 시도를 하기는 어려웠다. 다양한 디자인을 제시했지만 내부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등 매체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신문의 열독자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가독성, 심미성을 높이는 활자를 어떻게 개발할까 고민했다.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우리나라 디자인계 역량을 총동원해서 변화에 기여해보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 후 1면
조선일보 가로짜기 전용 서체
조선일보 가로짜기 전용 신문명조
조선일보 본문용 서체 변천
조선일보 신구서체 조판 품질 비교
Q.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나.
전산팀에 프로젝트가 맡겨졌는데, 그들은 속도와 안전성, 편의성, 경비절감, 인원절감 등이 목표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품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난 출판국의 디자인 책임자로 해당부서가 아니었지만 보고서를 제출했다. 납활자로 만든 신문을 전산화한다면 독자입장에서 얻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결과물이 납활자로 만든 것과 똑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좀더 읽기 편하고 아름답게 지면이 바뀌어 독자가 납활자로 만들었던 신문보다 훨씬 나은 신문을 보게 되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영진에 불려가게 되었고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신 서체 개발 계획을 입안 추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Q. 무척 보람을 느꼈을 것 같다.
현장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디자인협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특히 타이포, 편집분야의 확산과 정착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KOGDA) 시절 1990년과 1991년 용평에서 편집디자인 세미나를 열었는데 당대 대부분의 편집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등 큰 호응이 있었다. 3회 편집디자인 세미나는 92년도에 이천에서 열렸다. 편집디자인 세미나는 디자인사에 기록할만한 세미나였다고 자평한다.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아!6.25', 2000년, 전쟁기념관
'아! 고구려', 1993, 국립현대미술관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전 '우리들의 이야기', 1998, 예술의전당
광복 70주년 '사랑하라 대한민국', 2015, 문화역서울284
Q. 대형 전시 기획도 많이 하셨는데.
처음으로 기획했던 전시가 ‘아! 고구려’였다. 집안 고구려 고분 사진을 사진부 기자들이 찍어왔고, 그걸 가지고 전시를 하자 했다. 대다수가 사진을 프린트해서 액자에 넣어 전시하는 사진작품전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렵게 찍어온 사진을 그렇게 전시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입체적인 전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스케일을 느낄 수 있도록 실물 크기로 고분을 만들고, 고분 벽화 패턴을 가지고 복식도 재현하고 디오라마도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인 오리리널리의 이신우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뮤지엄 숍 수준의 굿즈 개발도 했다. 최고의 전시 디자인 전문회사인 ‘인타디자인’과 협업했다. 조선일보 문화부와 사진부, 문화사업부가 참여해 내용의 완성도를 높였다.
전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입체적인 초대형 전시와 조선일보의 매체 파워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아련함 등이 성공에 한 몫을 했다.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는데, 당시 사당동에서부터 과천현대미술관까지 차가 줄을 이어 늘어설 정도였다.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총 358만명의 누적 관람객이 전시를 보았다.
Q. 정말 폭넓게 디자인을 하셨는데.
Q. 사진은 언제부터 하셨나.
전업 사진가가 아니므로 출장을 갈 기회가 있거나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열심히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잡지 편집에서 사진의 해석과 편집에 대한 공부가 늘어갔고 사진가와의 협업이 잘 이루어졌다.
조의환 작
Q. 사진의 주제는.
조의환 작
제주에 있을 땐 자연과 농부가 만든 조형요소를 찍었다. 수많은 사진가와 관광객이 제주를 사진으로 기록하니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것을 찾았다. 조선일보에 사진과 글을 연재한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는 이방인과 제주사람들이 무심히 보는 것들을 찾아 정보를 주기위해 애썼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맸다. 품을 많이 팔았고 공부를 제법 했다.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 밭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제주사람들에겐 생업이다. 관광 이상으로 중요한 산업이 바로 농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제주의 밭을 찍게 되었다.
조의환 작
Q. 요즘엔 어떤 사진을 찍나.
오래전부터 담을 찍는다. 담은 여러가지 의미와 기능이 있다.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 침략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담너머로 보이는 풍광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다. 담은 세계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어 여행 중에 심심풀이를 겸해 찍고 있다. 최근엔 동양화의 공간구성이나 해석에도 관심이 많은데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새롭게 해석해 보고 싶다.
Q. 새로운 전시 계획은.
김녕만 사진집 <장사익 당신은 찔레꽃>
Q.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 WRICOS 2024 Poster
전환기정의워킹그룹 poster 2023
한 20년 이상 서 너 곳의 인권단체에 디자인 재능기부를 해오고 있다. 탈북민과 북한인권, 아시아여성아동 인권 활동 단체 등 비정치적 인권 단체다.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이라는 단체와 전환기정의 워킹그룹 등 내 나름 바람직한 활동을 한다고 판단되는 몇 곳, 그곳에서 날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재능기부를 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Q. 요즘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Q. 앞으로의 계획은.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사진제공_ 조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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