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비영화를 그다지 즐겨보지 않는다. 부패한 시체에 대한 거부감도 거부감이지만 좀비라는 존재 자체가 가진 상징성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래 좀비란 부두교의 주술로 시체를 부려 힘든 농사일을 대신 시킨다는, 약간은 건설적(?)일 수도 있는 산업역군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모 제약회사의 실수나 원인 모를 바이러스 유출로 인해 나타나며 당연히 농업발전 따위는 아랑곳없이 그저 사람을 산 채로 뜯어먹는데 여념이 없는 존재들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게 변질되어 버린 이들의 이야기에 현대인의 다수가 갈채를 보내며 매년마다 영화표를 끊는 이유는 이들의 모습이 다분히 현대인의 삶을 반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배불리 밥을 먹기 위해 타인을 갈취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해 똑같은 행동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한때는 그래도 멀쩡한 인간이었을 이 좀비들의 행태가 거울에 비추어진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았다. 내가 좀비영화를 그다지 즐기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찔려서이다.
하지만 여름이 다가오고 납량특선 공포영화가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 좀 생소한 좀비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의 존재 속 숨겨진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는 작가들이 좀비를 주제로 단체전시회를 한다는 것이다. 많이 궁금했고 그만큼 기대했다. 예술가들은 전문적으로 사물 속의 의미를 찾아나서는 직업군의 사람들인데, 과연 어떻게 좀비의 의미를 표현했을까. 혹시 그들은 내가 떠올리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어딜 가나 좀비가 횡행하는 이 사회에 대해 무언가 희망 정도는 말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비록 덧없을 지라도 말이다. 전시회의 타이틀은 '좀비 666, 전시장소는 갤러리 애비뉴, 기간은 6월6일부터 17일까지였다.
일단 전시회 건물 밖에서부터 가장 먼저 보이는 포스터는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었다. 메마른 선으로 표현한 좀비들의 모습은 썩 마음에 들었고, 나름의 분위기를 잘 살린 포스터였다. 전시장 유리문 앞에 파리가 윙윙거리며 맴돌고 있는 이유는 어디선가 짙은 꽃향기가 풍겨오고 있었기 때문일 테지만 어떻든 좀비와 파리라. 일단 주제와 썩 잘 어울렸는데, 전시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유하자면 전시회장은 한 편의 뮤지컬이라 할 수 있다. 구조를 고려한 그림 배치를 재료 삼아 동선을 설정하고, 그를 통해 관객의 희로애락과 여운을 조절하는 것이 미술전시회를 주최하는 사람의 할 일이다. 분위기를 확 휘어잡고 뇌리에 남길 정도의 무게를 가진 그림을 관객의 시선이 가장 먼저 떨어질 곳에 배치하는 것이 큐레이터의 기본이고, 관객은 큐레이터가 배치한 그림과 동선에 따라 감정변화와 클라이막스를 즐기다 마지막에 배치한 대미를 감상하며 여운을 가지고 전시회장을 떠나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 순서다. 때문에 인터넷이나 도록으로 접하는 작품들과 전시장에 가서 보는 작품은 동일한 작품이라고 해도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전시회를 들락거리는 이유이다.
보통 오른편으로 돌면서 감상하는 게 일반적인데, 들어서자 마자 한 눈에 딱 들어오는 작품이 두 점 있었다.
「이 거대한 작품이 갤러리 내부의 복층 구조를 이용하여 걸려있었다. 작가 반달은 시커멓고 거대한 먹물이 오만 가지 오물과 함께 우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는 듯한 그림을 통하여 좀비의 상징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거울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 들고나자 드는 것은 불쾌감이었다. 애당초 어렴풋이나마 가지고 있던 사회관이었기에 작가가 관객에게 느끼길 기대했을 충격은 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는 반문만 떠올랐다.
내가 예술가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현실고발에 그치는 훈계 식의 감정 폭출 만이 아니라, 그것을 승화시켜 개인감정의 공감을 호소하며 토해내는 어떠한 메시지였다. 개인감정의 표출과 충실한 표현을 통하여 어떤 위안이나 대리만족, 혹은 돌파구나 희망 등을 찾아보고 싶었는데 난데없는 좀비 여기 우글댄다는 식의 먹물 세례라. 작가의 개인감정 분출은 훌륭했지만, 이 Zombie Mass에는 분출만이 있을 뿐 승화는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
전면에 세로로 걸린 거대한 현수막같은 천에 그린 그림은 우선 크기부터 웅장했다. 반드시 전시장에 가서 실물을 보지 않아도 웬만한 그림은 인터넷이나 서적과 같은 매체를 통해 그 느낌을 어림잡을 수 있다고들 생각하는데, 그 웬만한 그림 가운데 웬만하지 않은 축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작품들이다. 작품의 크기로 사람의 시선을 끌고 압도하면 일단 그림을 대하는 눈이 달라지는 것은 속물근성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기본적인 본성 가운데 하나이고, 그러하기에 지금은 루브르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나치스 예술이나 운동권 걸개그림의 프로파간다들이 작품의 크기에 집착했던 것 아니겠는가.
갤러리 내부에서 당장 눈에 들어오는 또 하나는 설치작품인 surface zombie, 일명 꽃좀비였다. 골조를 무엇으로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성인 남자보다 약간 큰 크기로 만들어진 조형작품이었는데 특이하게 전신이 생화로 뒤덮여있었다. 전시장 바깥에서부터 풍겨오던 꽃향기의 근원은 바로 이 작품이었고, 인터넷이 아무리 빠르고 정확하더라도 향기를 전달할 수는 없기에 이 또한 직접 가서 보아야만 하는 부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좀비를 꽃으로 꾸민 것이 상당히 충격이었다. 꽃과 좀비라. 무슨 생각이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꽃은 시간이 흐르면 지는 법이고, 날짜가 흐를 때마다 점점 시들어 나중엔 정말 좀비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기존의 사물을 작품에 활용함으로서 무의미한 사물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레디메이드 방식과 작가의 능동적인 조형이 합쳐진 방식이었는데, 전시기간을 활용하여 좀비와 꽃을 섞어버린 묘한 발상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작가노트를 읽어보니 내장조차 꽃으로 채운 모양이었는데, 작가의 의도가 좀비조차 꽃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성이었을지 아니면 꽃조차 좀비(=사회성)의 일부일 뿐이라는 약간은 미심쩍은 허무주의일지 애매했기 때문에 마음에 가는 대로 상상하기로 했다.
좋은 작품이 가지는 중의적인 효과는 종종 이런 자유도를 부여하는데, 세월의 흐름에 낭만과 역발상, 그리고 꽃의 생장사멸에 따른 자동완성기능을 섞어둔 송송 작가는 자신의 발상역전에 대한 역량을 드러내면서도 주제에 충실했다. 오직 이 순간, 이때 전시장을 찾은 사람들만이 이 향기 나는 좀비를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기분 좋은 허영심까지 충족되는 순간이었다.
「잃어버린 소녀들의 도시는 이 정도 수준으로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그렇잖아도 볼 그림 많은 전시장에서는 이 그림을 관람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번역된다. 」
다시 현관으로 돌아와 오른편부터 돌며 감상하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연필로 그려진 것인데, 강렬한 조명을 액자의 유리가 반사하면서 연필선을 짓뭉개고 시선을 방해했다. 구명선 작가는 자기 그림에 비추일 조명을 신경쓰지 않았거나, 아니면 사소한 것이라 여기고 그만 놓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