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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 / 디자이너 박시영 조회수 16767

이상하다. 그가 맡았던 영화포스터들은 「짝패」부터 「고지전」, 「추격자」, 「공모자들」에 이르기까지 강하고 거친 수컷 냄새가 물씬 난다. 그런데 그 밑바닥에는 어떤 종류의 정서가 깃들어 있다. 상실감, 잃어버린 노스탤지어의 향수, 혹은 애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그는 넓게 펼쳐진 스트리트 뒤로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숨어 있는 후미진 뒷골목을 안다. 거친 입담과 농담 속에는 얇은 면도날로 손목을 긋는 듯한 서늘함이 느껴지고, 천천히 걷는 걸음 이면에는 오토바이의 미친 질주 소리가 들린다.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이마 위에 얹힌 영화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글 | 인현진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 서울


작품마다 어떤 ‘정서’가 느껴져요. 생각으로 파고들어 만든 게 아니라 작업한 개인의 감정이 날것 그대로 묻어나는 듯한. 색감은 어떻게 선택하시나요?

기술적인 부분은 저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애들이 땅에 떨어진 거 먹으면 너, 이러면 안 돼! 혼나면서 배우고 습득하잖아요. 저도 그렇게 천 번의 실수를 통해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라고 배운 거라. 직감이라고 해도 그건 분명 트레이닝된 직감이겠죠. 테크닉적으로도 부족하니 이미지를 배합해서 뉘앙스를 전달하는 부분을 파고 든 것도 있어요. 단지 정서를 담아내는 건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거고요.


「고지전」의 타이포그래피가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하신 건가요?

내가 미쳤지, 하면서 손으로 한 땀 한 땀(웃음). 설마 본편에도 그게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죠. 일일이 수작업을 했어요. 글자도 좀 넓혀보고,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긁어낸 듯한 분위기도 내고, 생각했던 대로 작업 결과를 내기보다 하나씩 해보면서 배우는 타입이에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짝패>도 사실 그때 제가 찍은 사진이 너무 못 나온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림을 그리다시피 후반작업을 했던 것이거든요(웃음).


「건축학개론」은 지금까지의 작업과는 좀 달랐던 것 같은데요?

제 안의 여심을 최대한 끌어 모았죠(웃음). 제가 좀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에 취약하거든요. 주인공이랑 저랑 마침 동갑이었어요. 그 시절, 그 거리 등이 자연스럽게 제 안에 떠올랐죠. 결국 남자의 첫사랑에 대한 영화잖아요. 인공미를 배제하고 자연스러운 스냅사진처럼 가고 싶어 조명을 배재했죠. 그런데 뒤늦게 깨달았어요. 아, 조명은 써야 하는구나!(웃음). 봄이 막 시작할 때의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미대를 그만두고 사회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무식한 거에 한이 맺혀서요(웃음). 미대 수업은 거의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요. 삼수를 해서 다시 대학에 갔는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죠. 일을 먼저 시작해서인지 대학에 간다고 제 인생이 바뀔 거란 생각은 안 했거든요.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할 것 같지도 않았고요(웃음). 그래도 앉아서 듣고 있으면 뭐라도 배우겠지 싶었죠. 결국 졸업도 못했지만요. 그래도 그 때 배운 것들이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로서의 갈증은 늘 느낀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위해 영화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 선수 사이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한 편 한 편의 영화가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길 바라기 때문이다. 문턱 높은 방 안에서 혼자 웃고 싶진 않다. 그래서 더욱 독립영화 포스터를 작업할 때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 요단강보다 넓은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를 좁히고 판 자체를 넓히고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느는 걸 보니 꼰대가 되어가는 것도 같은데, 그게 꼭 싫지만은 않다.


현재 진행중인 작업은 어떤 건가요?

<26년>, <남영동 1985> 하고 있어요. 어떻게 되든 이건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돈이 문제가 아닌 거죠. 처음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디자이너로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작업을 하면 할수록 영화적 재미를 부각하는 게 오히려 이 영화에 도움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이 영화에 도움이 되나 고민하면서 동시에 흥미로운 작업물로 디자이너 커뮤니티 내에서 회자되는 것, 그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하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욕심과 영화 사이에서 제 욕심을 부릴 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죠.


작업실 분위기는 어떤가요?

감정 기복이 별로 없어요.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선가?(웃음) 저희 작업실엔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포토샵을 알고 온 사람조차 없거든요. 대신 누구는 비언어적인 영역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또 다른 누구는 무드만 보는 식으로 각자 작업의 포인트를 두는 지점이 달라요. 포토샵 같은 기술적인 건, 죽었다 생각하고 파고들면 삼 개월이면 다 배울 수 있어요. 문제는 그 다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인데, 그건 자신의 몫이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지점을 보니까 강점이 되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나요?

최근 작품 중에는 영화적 성공을 떠나서 <광해>가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이건 제 잘못이 커요. 조금만 더 했으면 좋았을 걸 싶은 부분이 많거든요. 강요당하거나 휩쓸려서 못한 건 아니고 제가 좀 더 설득하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걸 못했어요. <하녀>도 그래요. 지금 보니까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여요. 배우는 표정을 백 프로 보여줬는데 그걸 더 살려내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최근 흥미를 갖거나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가 있나요?

요즘은 흥미로운 것이 없는 게 점점 꼰대가 되어가는 중인 것 같은데(웃음). 전 꼰대가 되는 것도 괜찮아요. 오히려 나이 많은 사람이 젊은 척 하는 게 싫어요. 애들한테 젊은 척 하는 기회를 뺏는 거잖아요. 나이 들면서 꼰대짓도 좀 해야 젊은 애들도 뭐, 저런 꼰대가 다 있어, 하면서 지들끼리 자유롭게 놀죠.



그의 얼굴엔 ‘집중’이 서려 있다. 맨몸으로 생을 뚫고 들어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몰입을 해본 사람만이 갖게 되는 표정이다. 손가락 사이엔 럭키스트라이크, 최백호의 방랑자를 즐겨 듣는 그는 늘 ‘현재’를 살아간다. 자신의 경험을 신뢰하고 현장을 존중한다. 작업일지를 쓰지도 않고 지나간 작업에 미련을 두는 일도 없다. 냉정하게 자신의 작업을 평가하지만 작업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뜨겁다. 그의 뜨거움은 영화 너머,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관심과 연민으로부터 솟아난다.


초기 작업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작업과 대중과의 소통 사이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언젠가부터 제 생각을 모두에게 전하겠다는 욕심은 버렸어요. 내가 납득이 가면 반 정도는 납득하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에도 빛나는 한 순간이 있잖아요. 시적 에스프리가 나타날 때처럼 한 이미지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면서 소통이 되는 지점이 있죠. 그런데 요즘엔 공유되는 지점이 줄어들면서 과연 소통 자체가 가능할까, 의문이 들 때도 있어요. 저야 뭐, 소통보다 칭찬에 목마른 사람입니다(웃음).


나를 디자이너로 살게 하는, 중요하게 지키고 있는 것이 있나요?

요즘 많이 생각하는 건 '다 같이 잘 살자!'예요. 저를 포함해서 손에 꼽히는 몇 명이 너무 많은 걸 갖는 것 같아요. 돈도 벌고 흥미로운 작업도 독식하고. 디자인한다는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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