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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은 역시 촌스러워야 제맛이다 / 김경균, 디자인 無口有言 조회수 16471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 서울

역마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회만 되면 돌아다닌다. 그런데 요즘은 가급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을 찾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촌스러운 곳'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전에 참 좋았던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면 해괴한 도시처럼 변해버린 모습에 실망하기 일쑤다. 영화나 드라마, 버라이어티 방송 촬영지로 한 번이라도 소개된 곳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찾아갈 가치가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 '네 가지'에 등장하는 촌놈 캐릭터가 떠오른다. 그 촌놈의 주장은 심플하다. 이제 촌은 더 이상 촌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도시하고 다를 바 없이 살고 있으니 촌에서 왔다고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촌은 정말 그렇게 되어버렸고 그래서 참 재미없고 안타깝다. 이제는 그 '촌스러운 것'을 만나기 위해서는 마치 보물찾기하듯이 오래된 동네의 뒷골목을 뒤지고 다녀야만 한다.

속초를 가도, 여수를 가도, 군산을 가도, 포항을 가도 오히려 서울과 다른 걸 찾기가 힘들다. 국가별 특성마저도 점점 사라져 서울은 일본스럽게, 도쿄는 한국스럽게, 상하이는 뉴욕스럽게 빠른 속도로 변해간다. 편의점, 커피숍, 패스트푸드 등 대형 프렌차이즈의 간판이나 맛은 물론이고 거리의 패션까지도 같은 틀에서 찍어낸 붕어빵처럼 닮아 간다.

한때 정치적 목적으로 오남용 되었던 공공디자인 열기가 이제는 조금씩 커뮤니티디자인으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공공디자인의 대상이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를 거쳐 휴먼웨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주최가 관공서에서 시민으로 온전히 이전되지는 못하였고, 지자체가 지향하는 목표 또한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아직은 공공디자인에서 커뮤니티디자인으로 단지 그 용어만 바뀐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런 크고 작은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에 관여하게 되면서 지자체와 만나보면 예산은 쥐꼬리지만 마음만은 이미 '턱별시'다. 인구 수십만의 작은 도시가 서울은 물론이고 수십 년에 걸쳐서 어렵게 성공한 유럽이나 일본의 사례를 들먹인다. 그 지역만의 경쟁력 있는 콘텐츠와 그 예산에 맞는 규모가 아니라 외형만 '턱별시' 따라가기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원래 촌놈은 촌스러워야 제맛이다. 그런데 자꾸 그 촌티를 벗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이것은 마치 돌산 갓김치가 본연의 맛을 버리고 서울 김치처럼 깔끔한 맛을 내려는 것과 같다. 더욱 욕심을 부려 국제경쟁력을 키우겠다고 일본의 장아찌나 서양의 피클 맛을 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돌산 갓김치가 아니다. 자기 정체성과 국제경쟁력을 동시에 잃게 되는 것이다. 지자체가 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이나 간판 정비 사업이라도 끝내고 나면 이런 현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 보면 아직도 남아있는 보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소중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소중한 보물인 경우가 많다. 전국의 동네빵집이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군산의 이성당 단팥빵이나 통영의 오미사 꿀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그 촌스러움을 오랜 세월 소중하게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디자인은 그 지역만의 소중한 촌스러움을 얼마나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에 그 해답이 있다고 하겠다.



최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의뢰로 통영문화지도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통영은 대학 시절부터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드나들던 곳이라 흔쾌히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통영풍류 50선'이라는 타이틀을 짓는 것에서부터 기획, 편집, 원고,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제작에 이르는 전 과정을 후배들과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콘텐츠를 선별하여 가장 통영스러운 문화관광정보를 역사, 인물, 공예, 음식 등 7개의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지리정보와 함께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최종 결과물은 스마트폰 정도 크기의 케이스 안에 카테고리로 구분한 40장의 카드와 32단 접지 지도가 들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접지형 관광지도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사용자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기 쉽게 하고,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의견 교환을 보다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카드 형식을 도입하게 되었다. 또한 무료 배포되는 것이지만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여행 경험을 주변 사람에게 선물함으로써 정보가 확산될 수 있도록, 기프트로서의 품격을 갖추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결국 내가 글쓰기를 자청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내가 글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 그 지역에 뿌리를 두고 통영에 대해 제대로 이해시켜줄 필자를 찾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본능적으로 통영의 촌스러움을 감추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통영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을 위한 디자인은 무엇인가, 또한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꾸밈없이 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나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다르지 않다. 글쓰기에도 디자인에도 최대한 힘을 빼고 통영의 본질 그 자체가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들에게 통영을 여행해 보도록 강요했다. 허름한 다찌집에서 술을 한 잔 걸치고 다음날 새벽 서호시장에서 시락국으로 해장을 해봐야 비로소 통영만의 그 소중한 촌스러움을 제대로 느끼고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공디자인이건 커뮤니티디자인이건 간에 촌은 역시 촌스러워야 제맛이고, 글쓰기건 디자인이건 간에 그 촌스러움을 잘 살려야 제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