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갈하다. 디자이너 정승현의 작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디자인 스튜디오 제너럴그래픽스에서 편집 디자인을 하는 그. 그의 작업에서는 화려한 치장보다는 깔끔하게 정돈된 이미지와 텍스트를 볼 수 있다. 매사에 냉소적인 자신의 성격을 '심술 난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그이지만 작업을 보면 '냉소적'이라기 보다는 '신중함'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 디자인이 본래 내용을 담아내기 위한 디자인이겠지만, 유독 ‘정제’한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디자이너 정승현에게 그가 생각하는 콘텐츠와 디자인에 대해 물어보았다.
기사 제공│타이포그래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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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소개하는 나 "안녕하세요. 제너럴그래픽스 정승현입니다." 업무 관계로 메일을 보낼 때마다 첫머리에 쓰는 문장인데, 이 문장 이상으로 저 자신을 따로 소개할 내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내세울 만한 멋진 작업도 독특한 행보도 없는 평범한 2년 차 디자이너라 이런 인터뷰가 어색하기만 하네요.
디자인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교 3학년 때 편집디자인 수업을 듣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업의 내용은 <ㅎㅇㅅㄷ>이라는 간행물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때 <ㅎㅇㅅㄷ>을 만들면서 콘텐츠를 파악하고 구조를 설계하며, 글과 이미지를 함께 다루는 편집 디자인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처음으로 북디자인 작업을 했던 출판사 북노마드의 단행본, '힐링캠핑'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디자인한 책을 처음으로 서점에서 검색해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아직 진열대에 놓인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작업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아쉬운 점들이 보이면서 차마 서점에서는 보지 못하겠더군요. 그래도 책꽂이에 꽂아놓고 가끔 들춰보면서 뿌듯해하기도 하고 반성할 점을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합니다.
작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충 책장을 넘겨보기만 해도 콘텐츠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쉽게 파악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도무지 전체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전체적인 골격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상황에서 그런 난해한 구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디자이너가 콘텐츠를 파악해서 예외의 상황이 거의 없도록 전체 골격을 잘 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잘 안 되어 고군분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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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디자인'이 주제가 아닌 콘텐츠로 '디자인이 훌륭한 잡지'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디자인이 훌륭한 '디자인 잡지'는 이미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잡지에 대해서는 소비자로 만족합니다. 오히려 디자인 관련 내용이 아닌 잡지를 콘텐츠 기획부터 시작해 '훌륭한 디자인'으로 소화해내고 싶습니다. 그 콘텐츠가 무엇이 될지는 앞으로 찾아봐야 하고요.
혹시 콘텐츠 기획자가 되려는 생각도 있는 건가요? 사실 콘텐츠 기획자라는 단어는 부담스럽습니다만, 막연하게 '기획자가 디자인을 하거나 디자이너가 기획을 했을 때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디자이너가 기획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없고, 기획자 역시 최종 결과물인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고 기획을 한다면 서로 손발이 어긋나 좋은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기획과 디자인을 같이 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작업이 될 것 같아요.
영감을 주는 나만의 특별한 장소 또는 물건 최근에 영감을 얻는 곳은 대부분 인터넷인 것 같네요. 인터넷에는 워낙 많은 것이 올라오니까요.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상의 순간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 출근길에 본 누군가의 멋진 운동화 색상이 오늘 작업하는 디자인의 색상 조합에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요.
작업하는 데 있어서 타이포그래피의 의미는? 목수가 상황에 맞게 잘 길든 '도구'를 골라서 사용하듯이, 그래픽 디자이너 역시 상황에 맞게 잘 길든 도구를 사용해야겠지요. 타이포그래피는 그런 도구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끔 한 가지 도구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톱질도 하고, 대패질도 하고, 망치질도 해야 하는데, 오직 손에 든 대패만을 고집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대패질로만 의자를 만들려고 끙끙대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이켜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대패가 좋은 대패인지 잘 고르고 대패질을 능수능란하게 익혀야겠지만, 만들 것은 '의자'이지 '대패'가 아니라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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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배우고, 경험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배우고 있는 처지에서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최근에 드는 생각은 '디자이너들이 너무 자기들끼리만 좋아하는 작업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나 선배 디자이너를 만나보면 대부분 클라이언트의 취향이 촌스럽다며 투덜거립니다. 속상함을 달래기 위해 만든 개인 작업은 멋있긴 하지만 주변의 디자이너들만 좋아하죠. 저 역시 제 모니터 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작업물을 휴지통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속상해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 회사 대표님이 일본의 어린이 과학잡지를 보여주셨는데, 5~6년 전의 잡지임에도 요즘 어른들이 보는 잡지보다 세련된 모습이었습니다. 문득 '일상에서 이런 높은 수준의 디자인을 소비하고 자란 사람의 취향이 촌스러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큰 악순환의 고리가 보이는 것 같았죠.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들끼리만 좋아하는 작업을 하면서 일상의 디자인에 관심이 없고, 일상에서 좋은 수준의 결과물을 소비하지 못한 사람의 취향은 당연히 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촌스러운 취향이 다시 디자이너를 괴롭히고, 괴로운 디자이너는 다시 디자이너들끼리만 좋아하는 작업으로 자신을 위로합니다. 언제 어디서 이 악순환이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디자이너들이 좀 더 주변을 둘러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수면, 과감함, 자신감
지금 가장 버리고 싶은 세 가지 아침잠, 경솔함, 자만
자신만의 야망이 있다면? 훗날 저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은 멋진 결과물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더 멋진 결과물도 만들고 싶은 것이 제 야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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