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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윤호섭 / 자연스럽게, 그저 자연스럽게 조회수 15650

버스 종점에서 내려 약도에 나온 설명대로 골목으로 접어들자 한눈에 그의 작업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담장 없는 집, 오른쪽엔 정갈한 채마밭. 줄을 맞춰 자란 상추와 치커리의 초록 잎이 싱싱하다. 담 옆 여기저기 놓여 있는 재활용품들의 쓰임새가 궁금해진다.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닫힌 문을 바라본다. 평소엔 문을 활짝 열어두고 오가는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게 한다고 했던가. 저 문 안에서 그는 평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작업을 할까?

글│인현진
기사 제공│타이포그래피서울


요즘 근황은 어떠세요?
거의 똑같아요. 주말에는 인사동에 나와서 그림 그리고 강연하고. 요즘 어린이 교실에 많이 가요. 작품 하는 재미가 들려서 작품하고. 점점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요(웃음). 예전보다 더 많이 하는데 다 좋아서 하는 것들이에요. 전에는 하기 싫은 일도 하고 그랬는데 요새는 재미있고 의미 있는 것만 해요. 인터뷰는 가급적이면 안 해요(웃음). 미디어의 속성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느 정도 흥미를 만들어야 하고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게 불편해요.

인터뷰 준비하면서 좀 조심스러웠던 게 그린 디자이너라는 수식이 때로는 불편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편해요(웃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고. 왜냐하면, 당연한 거니까. 그린이라는 말도 필요 없는 것 같고요.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린 디자이너잖아요. 저보다 더 근검하고 성실하게 사는 시민이 많은데 이런 거 조금 한다고 어디에 나고 이런 게 안 좋아요. 시각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너무 유난스럽지 않고 해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냥 소박하게 살면 소박한 거 자체가 다 디자인이거든요.

선생님 작품을 보면 건강한 소비 혹은 올바른 소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데 디자인이 갖는 선도적인 역할도 있을 것 같거든요.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웃음). 그런데 그게 답이에요. 음, 뭐라 그럴까…. 예를 들면 자동차나 냉장고 쓰지 말자 하면 어떻게 그러고 사냐고 하지요. 지금 마시는 커피만 해도 그래요. 커피나무 키운다고 환경을 파괴하기도 하거든. 예전에는 없이도 살았는데 기준점이 달라진 거죠.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많이 만드니까 많이 팔아야 하잖아(웃음). 자신도 모르게 훈련된 거죠.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나 말고도 많아요. 그런 분들을 인터뷰해야 하는 건데(웃음).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치세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요(웃음). 이런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 봐라, 발표해라, 그럼 발표하는 거예요(웃음). 저는 아무 준비 안 해요. 발표하는 거 들으면서 막 찌르죠. 모르는 건 못 찌르고(웃음). 내가 여기까지만 자네가 발표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만족스럽지 않으면 더 연구해 오라고 해요(웃음). 매주 에세이 쓰고 매주 발표하고 그러다가 괜찮은 이야기 나오면 이거 굉장히 좋을 것 같은데 할래! 안 할래! 하겠다고 하면 또 에세이 쓰고(웃음). 젊은 친구들이 아이디어가 굉장히 좋아요.



그린 디자이너 혹은 환경 디자이너로 그를 설명하기엔 너무 협소하다. 누군가는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로 알고, 누군가는 인사동에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주는 할아버지로 알고 있겠지만, 그 또한 그의 부분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크기를 가진 단어가 있을까? 어쩌면 그저 '자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오셨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어려운 점이 뭐가 있나, 그런 건 없어요. 오히려 아침마다 빨리 해가 떴으면 좋겠어. 빨리 해가 떠야 내가 이걸 하는데(웃음). 새벽에도 아이디어가 막 나오고 그러니까. 행성에서 생명체로 태어났는데 자기가 봐서 옳고 재미있는 일은 하다가 가야지 규율에 쫓겨서 시스템의 일원으로 사는 건 체질에 안 맞아요. 저는 영감으로 하루를 살고 또 몇 초씩 움직이는 사람이거든요.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을 텐데 실제 그래요(웃음). 그런데도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건, 주위 사람들의 호의 덕분이지요. 저 양반은 워낙 유난스러우니 그냥 놔두자, 그래서 큰 곤란 없이 해 왔죠(웃음).

지금 작업 중이신 작품은 어떤 거예요?
마침 막 끝낸 게 하나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이건 오리지널은 아닌데. 어떤 부인이 제 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 자기 남편이 뇌졸중으로 일곱 번 쓰러졌는데 그때마다 일어났고 올해 봄엔 정년퇴임을 한데요. 아내로서 남편한테 감사패를 주고 싶다고 디자인을 부탁하더라고.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삶이 참 대단하다 싶었죠. 뫼비우스 띠 형태로 만들어서 보냈어요. 일곱 군데 용접은 남편분의 칠전팔기 용기를 상징한 거고. 그래서 오리지널은 저한테 없어요.

그런 요청을 받으시면 작품도 직접 만들어주시나요?
의미가 있다 싶을 땐 해요. 돈 받고 하는 일은 아니에요. 예전에 어떤 여성분이 아버지가 코레일에서 34년 근무하다가 정년퇴임 하신다는데 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34개의 크로스바가 달린 걸 만들었지요. 레일의 의미도 있고 가족과 고객에 대한 사랑도 담았고. 이런 작업이 재미있어요.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녹아나잖아요.

얼마 전 미국 뉴욕의 중앙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나왔던데 어떤 일이셨나요?
손녀딸의 초청을 받아서 간 건데 우리 반에 와서 그림 그려주세요, 하니 별수 있나, 가야지(웃음). 지구의 날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 들어가서 티셔츠에 그림도 같이 그리고 그냥 재미있게 보냈는데 아이들이 굉장히 좋았나 봐. 학부모들한테 메일이 많이 왔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는데 '단순하게 사는 것이 이익이라는 걸 알았다.'는 내용이에요.


어느 청년의 눈빛이 이렇게 형형할 수 있을까. 좁은 골목과 드넓은 창공이 공존하는 그의 작업실처럼 높은 정신과 낮은 마음을 동시에 아우르는 그는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버린 것에서 삶의 의미를 건져내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다. 길가에 버려진 것들마저 그에게는 버려진 것들이 아니다. 소중한 작품의 영감이 되고 모티브가 되는 오브젝트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장미 향기를 맡을 줄 아는 그는 지금 이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환경단체나 동물보호단체하고도 일을 많이 하시나요?
제가 할 일이 있으면 하지요. 돌고래를 제주도 바다로 돌려보내는 모임에 가서 필요한 디자인을 했어요. 돌고래를 바다에 보내는 것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는데 비용도 비용이지만 바다에 가서 적응 못 하고 죽으면 어떡하나 염려하는 거지. 그런데 나라면 죽어도 바다에 가서 한 번 살다가 죽는 게 행복할 것 같아요. 여기서 항생제 맞고 점프하면서 오래 사는 거보다 거기 나가서 죽는 게 낫지. 공격받을 위험도 있겠지만 원래 살던 곳에서 사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나눔이나 환경을 생각하다가도 살다 보면 또 잊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은 사는 기준이 많이 달라졌지요. 결혼하는 젊은이들 보면 어디 전세방이라도 있어야 하잖아요. 저야 대학에 오래 있었고 밥은 먹고 사니 뭘 더 바라겠어요. 명성, 돈, 이런 게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게 조금의 재능이라도 남아 있다면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지요. 환경문제는 이제 윤리적인 문제거든. 내가 많이 쓰면 못 쓰는 사람이 생기니까. 못 쓰는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밥 먹다 남긴다고 북한 어린이들한테 직접 관련되진 않는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지구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게 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계획이란 게 뭐 없어요(웃음).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하는 거지요. 어린이 교실을 좀 많이 하게 될 것 같긴 하네요. 아이들이 좋아요. 에너지 넘치고. 이것저것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디자이너라는 이름도 떼고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인으로 살다가 가고 싶어요. 그게 편해요. 사람들이 날 잘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가방 메고 다니면 배낭여행 하는 외국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어요(웃음). 하루는 지하철에서 한 아주머니가 김치 좋아하느냐고 묻더라고. 외국인이 영어로 길 물어보기도 하고(웃음). 머리를 빡빡 밀어서 그런가(웃음).

젊은 독자들에게 한 마디 남겨주세요.
자신의 생각을 갖고 모두 훌륭하게 살고 있겠지만, 항상 자기 옆에 약자가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약자를 배려하자, 이런 차원을 떠나서 연민을 가지고 살면 좋겠고 길에서 그런 사람들 보면 무시하지 말고. 자기도 모르게 무시하는 눈길로 볼 때가 있잖아요. 연민의 눈으로 보고 도와주고, 그랬으면 해요. 진짜 자존심이라는 게 내가 잘나서 생기는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쓰레기 많이 만들지 마시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