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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자유주의자 / 디자이너 성재혁 조회수 16248

그런 사람이 있다. 한 번쯤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논리의 정반합을 넘어서 에피파니의 순간을 만날 것 같은. 그가 누구이든. 디자이너이든 교수이든 그런 직업적인 관점을 포함하거나 혹은 제외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고 싶은지를 오래 듣고 싶어지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성재혁 교수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글│인현진
기사제공│타이포그래피 서울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작업도 있고 제주 김녕 마을에 영구 설치될 과학, 예술, 건축의 융합으로 이뤄진 '자연과 미디어 에뉴알레'의 관련 홍보물을 맡고 있어요. 그리고 제 선생님이기도 하신 제프리 키디(Jeffery Keedy)의 에세이집 북 디자인을 하고 있어요. 우리 학교에서 열리는 조형전에 외국의 저명하신 분들을 초청해서 강연회를 여는데 이번에 오시거든요. 그 전에 책이 나와야 하는데.(웃음)

방학이라고 해도 오래 쉬지는 못하시죠?
네. 수업은 없어도 저희야 여기가 직장이니까 여러 가지 할 일들이 많네요. 다음 학기 대비도 해야 하고 또 입시가 있으니까요. 특별전형으로 외국인 학생을 선발하기도 해서, 학교에서 불시에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상시 대기 상태예요. 8월 말이나 되어야 쉬는 시간이 나는데 그땐 개강 준비를 해야 하니 쉬는 날은 또 없는 거죠(웃음).

같이 오신 에디터분이 선생님 수업을 들었던 제자시죠?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봐요(웃음). 무서운 선생님이신가요?
무섭진 않은데 단호하긴 해요. 작업뿐만이 아니라 디자인 자체에 대해서, 단호해요. 공부하는 입장이니까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고, 콘텍스트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논리적인 개연성이 결여되면 정확하게 얘기하죠. 개인적으로는 친구처럼 편하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원칙이 있고, 무조건 편한 데로 가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성적 이의 안 받고요(웃음). 불만이 있더라도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하더라고요.

디자이너로서 사고의 틀을 키우려면 어떤 것을 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독서를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적어도 자기 분야에 대한 책들은 전부 읽어내야 한다고 봐요.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면 다른 분야에서 이야기하는 것들도 내 것으로 끌어올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교육되어온 방식이 결과물에 중점을 두다 보니, 만드는 것만 생각하지 자기 생각을 철학적으로 정립하는 점은 많이 부족하거든요.



그는 규칙이나 법칙을 금과옥조처럼 여기지는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이나 법칙엔 늘 왜 그래야 하지? 의문을 던진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길이 존재한다는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가차 없이 크리틱을 하는 엄정함과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문을 여는 자유로움은 그에게 디자인과 교육이라는 드넓은 창공을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양 날개와도 같다.

타이포그래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타이포그래피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이죠. 너무 보편적인가요?(웃음) 사실 전 어떤 법칙은 믿고 싶지 않아요. 타이포그래피를 하다 보면 룰이 있고 정리가 많이 되어 있는 분야다 보니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법칙이 은연중에 강조되어 있고, 필드에서도 익히기를 원하고, 그런 매뉴얼이 있지요. 상황은 이해가 되지만 한계점이 명확하게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죠. 자유롭게 다른 방향으로 풀어놓을 수 있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학생들이 새로운 마인드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지금 교육제도 안에선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게 한계가 있지 않나요?
물론 그렇죠. 가르치는 사람도 복잡한 것에 대해 크리틱을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가변성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쉬운 방향으로 가면 발전이 없다고 봐요. 다행인 것은 예전에 비하면 새로운 시도가 많아지고 있어요. 현장에서 요구되는 테크닉적인 부분을 습득하면서도 관습에서 벗어난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만한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가변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어디까지 타이포그래피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그 유명한 '가독성'을 진리처럼 말하는 것부터 깨야겠죠. 텍스트로 읽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가독성이 강조되지만 가독성도 표현의 한 부분이거든요. 읽어야 하는 경우엔 가독성이 중요하지만 읽지 않아야 하는 경우에도 가독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글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구나, 라고 알려주는 것과 글은 무조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인식 자체에서 많이 다르니까요.

이미지와 문자의 경계를 많이 두지 않으시나요?
네. 전 그런 편이에요. 타이포그래피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이야기를 해주고 있잖아요, 그래피니까(웃음). 문자도 결국은 추상적인 이미지에요. 문자는 형태가 없잖아요, 서체가 형태가 있는 거죠. 기역은 기역이고, 기역의 꼴인 서체가 부여되면 고딕체, 명조체로 표현되는 거죠. 이미 이미지화된 거니까. 말로 했을 때도 한글로 머릿속에 구성되지만 형태는 아니잖아요. 손 글씨도 형태가 부여되어야 나오는 것이고, 표현이 되었을 땐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구현된 것이니까요.



그는 디자인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다. 아니, 그냥 단순하게 '높다'라고 말하고 끝내버리면 그가 가진 사고와 정서의 깊이를 오히려 폄하하는 형국이 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면 개인은 누구나 자기 삶의 디자이너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교육은 필생을 걸고 도전해볼 만한 거대한 디자인 프로젝트다.

특히 교육에 많은 힘을 쏟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굳이 나눈다면 디자인이 부업이고 교육이 본업이라고 생각할 정도죠(웃음). 그런데 저한테는 교육 자체가 디자이너로서 생각하는 프로젝트거든요. 가변적이더라도 예상하고 있는 데드라인도 세워놓고 있고, 1차를 지나 지금 2차를 진행 중이고요, 3차까지 하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가 언제일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요.

학생들 수업이나 개인 작업을 할 때 특별한 프로세스가 있으신가요?
누구나 다 비슷할 텐데, 주제를 조사하고 조사를 바탕으로 해석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죠. 특별한 영업 비밀은 없습니다(웃음). 제 나름대로는 다양한 방법들을 실험하긴 하죠. 좋은 디자이너가 지니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속도라고 생각해요. 느리고 잘 안 나오는 건 게을러서 그런 거죠. 충분히 연습을 안 하고, 방법에 대해 고민을 안 하고, 좋은 것을 빨리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서 상황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는 건 공부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오는 건데 왜 성적이 안 나오느냐고 말하는 거랑 비슷하잖아요(웃음).

공부 안 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깨우쳐주세요?
의지가 없으면 할 수 없어요. 자기가 의지를 갖고 정말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 들어오는 학생은 정말 드물어요. 디자인이 무엇인지, 이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알고 들어오는 학생도 없고요. 대부분은 그림이 좋아서, 광고가 좋아서 왔어요, 라고 하죠. 현재 교육 시스템으로는 고3이 비전을 갖고 들어온다는 것도 어려우니까 어찌 보면 막연한 게 당연하죠. 저희는 1학년 때부터 하드 코어 시스템으로 공부를 시키니까 따라오는 학생들은 3~4학년쯤 되면 달라져요.

본인이 생각하시는 디자이너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요?
디자이너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지 물건을 잘 만들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디자인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하고 꿈틀거렸던 사람들이에요. 많은 강연을 듣고 글을 읽고 작품을 다시 보면서 이해를 하고 관점을 지니려고 노력한 거죠. 통찰력이 생기면 상황에 대해 제안도 할 수 있고 기획도 가능해지거든요. 단지 정해진 콘셉트에 따라 쓰이고 마는 사람이 아니라 전권을 가지고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여러 가지 관점들에 대해 내가 경험하는 것이 꼭 필요해요. 나는 여기에 동의하는가, 아닌가를 생각하다 보면 조금씩 나의 관점이 생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