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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용기, 그래픽 디자이너 김동환 크리에이터 조회수 15162

마당이 있는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깨끗이 닦인 나무창틀을 바라보았다. 반들반들 윤이 나서 손으로 쓰다듬고 싶어졌다. 정성이 깃든 공간, 향긋한 커피, 맑은 하늘,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음악. 반갑게 인사하며 만난 그는 이 모든 것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개성을 간직하면서도 주변과 어울리는 느낌. 다양한 전시회와 백남준 아트센터 등 주목할 만한 작업을 해온 김동환 디자이너를 만났다.

기사제공│타이포그래피 서울


최근 근황은 어떠세요?
작업 스튜디오를 대전에서 시작해서 그 준비를 했어요. 함께 하는 동료들도 있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갈지 기대가 돼요. 일은 꾸준히 해오고 있었는데 새로 시작하는 마음이 드네요. 일할수록 교수님들 생각이 많이 나고,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어요. 성재혁 교수님 조교로 있으면서 트레이닝이 된 부분도 있고, 정진열 교수님 스튜디오에서 일하면서 배웠던 프로세스가 크게 도움이 돼요. 

본인이 생각하기에 선생님들께 받은 가장 큰 배움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신감과 용기예요. 디자인할 땐 용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데 사실 용기가 없어서 못 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계를 설정하는데 그런 점이 안타깝죠. 그걸 깨주려고 노력해요. 시도해도 괜찮다고 격려를 많이 하는 편인데 저도 말한 대로 본을 보여야 하니까 애쓰는 점도 생기고요. 지금 생각해도 좋은 분들을 만났던 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받은 만큼 전해주고 싶은데 쉽진 않네요(웃음).

지난 10월 11일까지 삼원페이퍼갤러리에서 열렸던 디보이스 전시회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셨나요?
큐레이터분께 연락이 와서 참여하게 됐었는데 최근에 활동을 왕성히 하는 디자이너, 스튜디오, 캘리그래피 작가들이 선정 기준이었다고 들었어요. 강구룡 작가님과 포스터와 도록 작업을 했는데 의미 있다고 느낀 점은 지방에 있는 스튜디오도 참가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이에요. 지방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많은데 앞으로 전시를 통해 알려지거나 교류할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디자이너분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단순히 작업을 만들어내는 행위에서 끝내는 게 아니라 기획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전체를 보는 시선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아직은 디자이너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일을 하다 보면 포스터나 이미지 만드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해서 충돌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단순히 주문을 받은 대로 스킬을 발휘해서 결과물을 예쁘게 만드는 것에 한정된 건 아닌데. 저도 학교에서 배울 땐 그렇게 배웠고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서 일을 하다 보면 부딪치는 부분이 많죠. 이런 부분을 어떻게 맞춰나갈지 고민이에요. 글을 쓴다든지 사회적인 활동을 통해 목소리를 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그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을 보면 규칙을 새로 정해서 변형을 하는 것들이 많다. 그는 기존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있는 것을 다르게 보게 한다. 올림픽 경기부터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재치 발랄하게, 때로는 진중한 프로세스 과정을 오롯이 느끼게 한다. 관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호기심을 갖고 자유롭게 작업을 하는 용기. 그의 작업에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점이다.

작업하면서 변화가 있으셨을 것 같은데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학생 때랑 그 이후의 작업을 구분해보면, 디자인이 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했던 작업이 많고요, 졸업 이후엔 배운 것을 어떻게 잘 적용해서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많아진 것 같아요. 관심 가면 관심 가는 대로, 궁금함이 생기면 그걸 푸는 방식으로 작업해온 편이라서 딱히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네요(웃음).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타이포그래피 작업인데 만화 프레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거예요. 만화 프레임은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은데도 칸과 칸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면서 읽잖아요. 그걸 타이포그래피에 적용해도 통할까? 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프레임에 타입을 풀로 채워서 늘려서 넣어봤어요. 아다치 미치루의 만화 H2의 한 장면인데 그 프레임에 아다치 미치루를 넣어도 읽힐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거죠. 이런 식의 실험을 작업에서 많이 해봤어요.

기존의 것에 새로운 규칙을 적용해서 결과를 보는 작업들이 많은 것 같아요.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유로운 발상을 해서 작업을 했던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아이덴티티 작업의 경우 텍스트가 따로 정해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경기 기록을 그래픽으로 작업한 경우 경기의 데이터들을 적용해서 선들을 왜곡시켰어요. 새로운 규칙을 정해서 대입을 해본 거예요. 해보니까 재미있어서 올림픽 경기들까지 발전을 시켜서 해봤어요. 시각적으로 직관적으로 보이는 게 흥미롭더라고요.

이런 발상은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콘텐츠에서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그 외에 다른 요소도 물론 있지만 전달해야 하는 내용을 해치면 안 되니까요. 앞의 작업들도 경기기록이라는 것은 이미 수치화되어 있고 경기장도 룰로 정해져 있으니까 콘텐츠값을 적용했을 때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전 작업을 할 때 콘텐츠에 충실한 편이에요.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기보다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할까에 초점을 맞춰요.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그러나 디자이너의 작업 공간은 반드시 서울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대전에 스튜디오를 두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그를 만나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기질도, 모두 서울로만 오려고 하는 흐름에 편승하지 않는 선택도, 용기 있게 보인다.

아이덴티티에 관련된 작업도 흥미로워요.
텔레비전에서 간접광고를 못 하게 하잖아요.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가려도 뭔지 알잖아요. 뻔히 알 수 있는 상표고. 방송국의 논리대로 해보면, 일부만 가리면 그 브랜드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테이프를 붙인 로고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테이프를 붙인 행위 자체를 아이덴티티로 삼아서 제 브랜드로 만든 거죠. 상표 위에 테이프만 붙이면 되니까(웃음).

프로세스의 경로가 다양한데 그래도 아이디어를 내실 때 출발점이 있을 것 같아요.
학생 때는 그때그때 달랐던 것 같아요. 일단 내가 관심이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요. 겁 없이 작업했죠. 사실 겁을 낼 필요가 없잖아요. 정치적인 이슈건 사회적인 이슈건 내 생각을 표현하는 일을 많이 했어요. 일부러 잘 읽히지 않도록 하기도 해보고, 텍스트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작업도 해보고. 최근에는 콘텐츠에 집중해요. 콘텐츠를 이해하고 시각화하는 일에 힘을 더 쏟아요.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아직 '맺음'은 없고 계속 진행 중인 것 같아요. 관심 있는 것을 시각화하고 만드는 행위에 두려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생각이 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해서 창의적으로 만드는 것보다 어떤 형태가 창의적인가, 형태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 이 고민은 디자이너라면 항상 하는 건데 그중의 한 방법으로 기존의 규칙을 바꾸는 일이 제 작업엔 많았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획순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형태가 바뀌거든요. 형태를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규칙만 새로 정하면 형태는 저절로 만들어지니까요.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주신다면요.
디자이너들이 사회에 나와서 할 수 있는 영역이 다양하잖아요. 본인들이 뭘 하고 싶은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막연하게 창의적이고, 번쩍거리는 결과물을 내놓는데 관심이 많은데 사회에서 일하다 보면 의외로 그건 중요하지 않거든요. 그보다는 자기 목소리를 내면 좋겠어요. 모창 가수가 되어 흉내 내는 것보다 자기 노래를 부르길 바라죠.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길 바라요. 과제를 할 때도, 과제는 다양한 방법론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은 커리큘럼이라도 커리큘럼만 따라가면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꾸준히 따라 하면 익힐 수 있는 거니까. 자기만의 생각을 하고, 자기 시선에서, 자기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학부 1학년은 어느 대학이든 똑같다고 봐요. 하지만 4년 후엔 무서울 만큼 큰 차이가 생기죠.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울지, 자기 몫을 고민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