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을 위한 그로테스크 일러스트레이션, 새도(Saddo) 디자인 홍수 속에서 영감 찾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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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를 달리 표현하면 ‘정보 과잉의 시대’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클릭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될 듯했지만, 물밀듯 쏟아지는 정보 속에 웹서핑은 손가락을 끝없이 고문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영감을 갈구하는 디자인 종사자들에게도 정보 가려내기란 여간 성가신 문제가 아니다. 셀 수 없는 디자이너들이 웹상에 포트폴리오를 게재하는 가운데, 볼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이에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해외 디자이너들을 선별해 그 작업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루마니아 출신의 아티스트 새도(Saddo)가 갓 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에게 주어진 진로 결정의 폭은 넓지 않았다. 대담하게도 그는 뭇 학생들처럼 그래픽 디자이너나 교사가 되는 대신 거리로 나오기를 선택한다. 루마니아 거리 예술 조합 ‘더 플레이그라운드(The Playground)’의 창립을 기점으로 새도가 거리를 누비며 쌓은 경험은 그의 예술관과 세계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제 새도는 유니크한 스타일로 마니아를 확보한 거리 미술가이자, 광고 회사들과 협업하며 경력을 쌓아 온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다. 동시에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비롯하여 비엔나, 베를린, 코펜하겐, 스톡홀름, 뉴욕, 몬트리올 등 세계를 순회하며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해 온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거리 미술부터 호러 영화까지, 새도가 받는 자극과 영감의 배리에이션은 방대하다. 그는 거침없이 분야를 횡단하며 그만의 양식을 정제해 나가는 중이다. 작가 본인도 영향관계를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지만, 새도의 일러스트에서는 실로 15~17세기의 거장들 – 그중에서도 특히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와 피터르 브뢰헬(Pieter Brugel) 같은 북유럽 화가들의 화풍이 물씬 느껴진다. 신에 대한 경외심이 인간을 지배하던 계몽 이전 시대의 음울한 분위기, 소위 ‘중세적 그로테스크함’은 그 연결고리가 된다. 종교, 신화, 민담, 자연주의, 초현실주의 등 숭고하고 환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새도는 이러한 요소들을 개인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물론 새도의 어둡고 기괴한 스타일은 호불호가 갈릴 법하다. 그의 작품은 일러스트가 ‘더 예쁘고’, ‘더 밝고’, ‘더 설명적인’ 그림이기를 기대하는 업계의 통념을 등지고 있다. 비록 상업성이나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행보에는 분명히 일러스트레이션의 다양성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다. 이는 독자적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보다 삽화, 장식 등 시각적 보조물로 취급받기 쉬운 일러스트레이션의 지위적 한계를 뚫고 나오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한다.
주요 작업
〈조류 인간의 발흥(RISE OF THE BIRD PEOPLE)〉 Objectos Misturados 갤러리, Viana do Castelo, 포르투갈(2014. 3. 31~2014. 7. 5)
15~17세기 침략을 전개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복자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업한 〈조류 인간의 발흥〉은 새도의 첫 번째 단독 전시였다. 이 시리즈에서 새도는 인간의 얼굴을 새 머리로 교체함으로써 침략자들의 자화상을 비튼다. 이는 초(超) 조류 집단이 최후의 인류를 지배하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행해온 전쟁 역사의 말로(末路)는 인간 멸종이라는 시나리오를 통해 새도는 지상 모든 생물에 존중을 표하고자 했다. 〈환상 특급〉과 〈혹성 탈출〉, 히치콕의 〈새〉와 같은 공상 과학 영화 및 공포 영화도 〈조류 인간의 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관(棺, COFFINS)〉 La Petite Mort 갤러리, 오타와(2014. 8. 15~2014. 8. 28)
새도가 그의 연인 에이치(Aitch)와 함께 러프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던 시절, 그들은 막 리스본으로 거처를 옮긴 직후였다. 갑작스레 닥친 겨울과 적막하고 우울한 생활은 두 사람의 정서와 신체 상태에 영향을 미쳤다. 어둡고 습한 집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 뼈마디가 쑤시는 몸속에 묶여 있다는 느낌은 종종 그들의 작업 위에 ‘관(棺)’ 형상으로 떠오르곤 했다. 이후 새도와 에이치는 최고의 ‘관’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관〉 시리즈 작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어두운 감정과 불면증을 으스스하면서도 아름다운 형태로 재현했다.
〈정원의 이방인(A STRANGER IN THE GARDEN)〉 BC 갤러리, 베를린(2015. 03. 13~2015. 04. 25)
죽음은 인류 역사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로서 종교, 전통, 의식, 신화, 철학의 주제가 되어 왔다. 신화, 민담, 종교에 대한 천착은 새도가 색다른 시각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계기로 작용했다. ‘부활’ 혹은 ‘영원한 망각’. 죽음에 대한 이 양극화된 인식 사이에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할 수 없는 무수한 뉘앙스가 존재한다. 새도는 죽음의 신이 그 이름, 외양, 의미를 바꿔 가며 한 문화에서 다른 문화로 이주하는 속성을 띤다고 보았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개인화된 신’을 일러스트화한 시리즈가 〈정원의 이방인〉이다.
지금까지는 새도의 철학적 사유가 극단적으로 발휘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그가 에이전시나 단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제작한 일러스트를 살펴보자. 개인 작업과 비교하면 퍽 밝고 대중적이다.
〈부쿠레슈티 여행자 지도(BUCHAREST TOURIST MAP)〉
‘Interesting Times Bureau’의 의뢰로 제작한 부쿠레슈티 여행자 지도다. Interesting Times Bureau는 부쿠레슈티의 예술, 역사, 사업 증진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 단체 ‘Noua Ne Pasa’가 주관하는 프로젝트로, 지역 예술가, 음악가, 역사가, 사진가, 탐험가 등과 협업하며 여행객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해왔다. 대안적인 투어 가이드로써 제작된 이 지도는 실용성은 떨어지지만(?) 흥미롭고 유머러스하다. 말 그대로 ‘대안적’인 지도다.
〈번 포스터(BURN POSTERS)〉
‘번’에서 주관한 이벤트 홍보를 위해 제작한 포스터로,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스(Goth)적이면서도 팝아트적인 화풍을 활용했다. 손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포토샵으로 채색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으며, 손맛이 살아 있는 드로잉과 집요한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영상] 새도의 BUKRUK 벽화 작업 과정
〈BUKRUK 벽화〉
2013 방콕의 BUKRUK 거리 미술 페스티벌을 장식했던 대형 벽화 작품이다. Mytille Tibayrenc, Nicolas Dali, Bow Wasinondh가 공동 기획한 BUKRUK 거리 미술 페스티벌은 2013년 빠뚬완(Pathumwan) 교차로 근방의 공공장소를 그라피티와 음악으로 물들이는 장관을 연출했다. 2013년 행사에는 새도 외 13명의 유럽 아티스트와 11명의 태국 아티스트가 참여했다.
〈톨릭 만화(COMICS FOR TOLIX)〉
인트로 디자인(Intro Design)의 새로운 톨릭 의자 출시를 기념해 제작한 홍보용 만화다. 새도는 짧은 카툰을 통해 디자이너 자비에 포샤르(Xavier Pauchard, 1880~1948)의 아연 도금 실험부터 최종 제품 생산에 이르는 톨릭 시리즈의 역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무게감 있는 표현과 테마가 주를 이루는 새도의 최근 작업은 뜻밖에도 일러스트 카드 소품이다. 새도와 에이치가 우연히 *‘기억력 게임(memory game)’의 재미에 빠지면서 자신들만의 기억력 게임 카드를 제작해보기로 한 것. 두 사람은 꽃, 식물, 새, 동물, 패턴 등 자신들이 즐겨 쓰는 소재를 활용하여 24종의 일러스트를 수채화 혹은 아크릴로 작업했다. 총 48장으로 구성된 새도×에이치 컬래버레이션 카드의 제작 비용은 크라우드소싱으로 마련했다. 지난 7월 11일, 새도와 에이치는 소셜 펀딩 사이트 인디고고(Indiegogo)를 통해 1,150유로의 모금액으로 펀딩을 마감, 제작에 돌입했다.
* 기억력 게임: 짝수로 구성된 전체 카드 세트에서 각각의 낱장 카드는 동일한 카드를 한 짝씩 가지고 있다. 여러 장의 카드를 뒤집어 놓고 턴이 돌아올 때마다 기억력에 의존해 같은 그림 쌍을 찾아내는 고전 보드 게임의 일종이다.
연인이자 동료인 새도와 에이치는 현재까지도 영감을 주고받으며 작업에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때로는 자못 진지하게, 때로는 재미로 작업하는 그들은 그라피티부터 일상 소품을 아우르며 파이를 확장해가는 중이다. 좀처럼 주관을 밀고 나가기 힘든 일러스트 업계에서도 비주류적 감성을 지닌 새도가 두각을 드러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명확한 세계관과 독보적인 아이덴티티, 그리고 이를 떠받치는 빼어난 퀄리티 덕분이리라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