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 시대를 달리 표현하면 ‘정보 과잉의 시대’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클릭 한 번에 모든 것이 해결될 듯했지만, 물밀듯 쏟아지는 정보 속에 웹서핑은 손가락을 끝없이 고문하는 과정이 되어버렸다. 영감을 갈구하는 디자인 종사자들에게도 정보 가려내기란 여간 성가신 문제가 아니다. 셀 수 없는 디자이너들이 웹 상에 포트폴리오를 게재하는 가운데, 볼 것이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 지 모를 지경이다. 이에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해외 디자이너들을 선별해 그 작업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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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라는 출신 성분만으로도 디자이너에게는 시쳇말로 ‘금수저’라 할 만하다. 명실상부 꿈의 디자인 대학인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의 터전, ‘몬드리안 재단(The Mondriaan Fund)’이 연간 2,600백만 유로의 예산을 시각예술에 투자하는 나라.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더치 디자인’은 네덜란드 발(發) 디자인 트렌드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로 자리 잡았다. 국내에서도 ‘슬기와 민’을 단초로 제법 이름을 알린 더치 스타일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감각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 같은 혁신은 실로 북유럽적 합리성이라는 토질 위에서 움튼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독립 디자이너 팀 뵐라스(Tim Boelaars)의 장기라 할 수 있는 아이콘 일러스트레이션은 절제의 외줄을 타는 분야다. 아이콘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조형 요소는 일반적인 그래픽 디자인의 그것에 비해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들은 픽셀 혹은 벡터를 활용해 심미와 기능이라는 상반된 업적을 성취한다. 잘 만든 아이콘은 소박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아름답고, 논리적인 시각 정보로 사용자의 직관을 자극한다. 압축, 상징, 덜어냄의 공정은 아이콘 디자인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발휘하게끔 한다. |
| 마찬가지로 팀 뵐라스의 아이콘, 아이덴티티, 아이콘, 제품 디자인에서는 예리한 단순성과 개념적인 명료함이 빛을 발한다. 뵐라스는 올해 스물다섯을 넘겼을 뿐이지만, 이미 남성 전용 스토어 ‘콘크리트 매터(Concrete Matter)’의 공동 창립자이자 소규모 브랜딩 전문 스튜디오 ‘프레임(Frame Inc.)’의 창립자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레이밴’, ‘랜드로버’, ‘구글’, 〈뉴욕 타임즈〉 등 세계 정상의 기업들과 협업해 온 프리랜서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때로는 열 줄 이력보다 한 점 작품이 더 효과적으로 작가를 설명해주는 법. 지금, 뵐라스의 디자인 세계로 진입해 보자.
잡지 삽화 일러스트레이션 |
| 〈Men’s Journal〉 Art direction: Kim Gray
〈Men’s Journal〉에 실렸던 기사 ‘완벽한 도시들(Perfect Cities)’에 삽입된 일러스트레이션이다. 뵐라스는 채색 작업 없이 단 두 가지 컬러의 라인만을 사용하여 10종의 아이코닉한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했다. 뉴올리언스의 재즈와 내슈빌의 컨트리 음악, 항구도시 포틀랜드, 공업도시 클리블랜드&피츠버그 등 각 도시를 대표하는 산업과 명물을 아이콘으로 형상화했다. |
| 〈Popular Mechanics Magazine〉 Art direction: Tim Vienckowski
〈Popular Mechanics Magazine〉은 테러리즘을 다룬 기사를 시각적으로 보조하기 위해 아이콘 일러스트레이션과 삽화를 주문했다. 4개의 아이콘은 각각 공중, 해상, 육상,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테러 공격을 함축하고, 삽화의 경우 항공기 미사일, 위성 폭탄, 폭탄 화물 컨테이너, 지하철 대기 분석기(a subway air analyzer)의 단순화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
| 〈Fortune Magazine〉 Art director: Michael Solita
〈Fortune Magazine〉에 실린 아이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컴퓨터 프로세서의 발전 과정을 로봇의 진화에 비유했다. 좌측부터 우측으로 갈수록 현대화되는 연대기적 구성을 취한다. |
| 〈Fast Company Magazine〉 Art Director: Florian Bachleda
〈Fast Company Magazine〉에 수록된 보조 삽화다. ‘인스타그램 상에서 가장 ○○한 미국 도시는 어디인가?’라는 기사 주제와 내용에 따라, ‘화려한’, ‘술 취한’, ‘건강한’, ‘행복한’, ‘독실한’, ‘비도덕적인’ 등 여섯 가지 캐릭터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했다. 기존 작업에 비해 표현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뵐라스 특유의 심플하면서도 합리적인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UX 아이콘 일러스트레이션 |
| Google Art direction: Chris Ivarson
구글 캠퍼스에서 진행했던 사용자 경험 향상 프로젝트다. 뵐라스는 구글의 다섯 가지 CI 컬러를 응용해 청소도구, 사원증, G-플릿(구글의 카 쉐어링 프로그램), 세탁실, G-바이크 등을 지시하는 다섯 종의 픽토그램을 만들어냈고, 이들은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전세계 구글 캠퍼스에 비치되었다. |
| Allegion Art direction: Lindsay Hadley & Evan Finch
보안 장비 및 솔루션 공급 업체 알레지온(Allegion)은 사내 미션을 시각화하기를 원했다. 알레지온은 세계적으로 8,000명의 사원을 보유한 글로벌 기업이다. 이에 뵐라스는 국적에 관계 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시각 언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방패 형상을 베이스로 응용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순서대로 ‘목적을 가질 것’, ‘비전을 가질 것’, ‘자율적으로 책임을 다할 것’, ‘본인이 아닌 타인을 위해 일할 것’, ‘본인이 하는 일을 즐기고 본인의 존재를 축하할 것’, ‘옳은 일을 할 것’,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열정을 가질 것’, ‘안전하고 건강할 것’, ‘호기심을 가질 것’, ‘당신의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할 것’ 등 10대 기업 강령을 나타낸다. |
| Zendesk Art direction: Toke Nygaard
클라우드 기반 고객 지원 소프트웨어 서비스 기업 젠데스크(Zendesk)의 사무실 인테리어 개선 프로젝트다. 젠데스크는 샌프란시스코 지사 내 회의실을 구분하기 쉽게 각각의 공간에 고유의 정체성을 부여하길 원했다. 젠데크스는 ‘미소짓는 붓다’를 기업 로고로 사용하는 등 일본식 불교 선종(Zen)의 아이디어를 따르고 있는 만큼, 분재, 거북이, 종, 책가방 등 동양적인 아이템을 활용해 기업 아이덴티티에 부합하고자 했다.
브랜딩/아이덴티티 |
| Zuiver Incasso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소재한 채권 추심 회사 ‘Zuiver Incasso’는 뵐라스에게 독특하고 강렬한 동시에 가볍지 않은 기업 아이덴티티를 요청했다. 뵐라스는 ‘Zuiver’가 네덜란드어에서 순수(pure)를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해 순수한 형태와 명료한 커뮤니케이션에 주안점을 뒀다. ‘Zuvier’ 부분에는 주문 제작한 로고 마크를, 하단의 ‘Incassojuristen’에는 로고와 어울리는 타입페이스를 사용했다. |
| Concrete Matter ‘콘크리트 매터’는 ‘유용하고, 오래 가고, 아름다운(Useful, Durable, Beautiful)’ 상품을 판매하는 남성 전용 빈티지 숍이다. 뵐라스는 ‘콘크리트 매터’의 공동 창립자로서 브랜딩과 사진 촬영, 마케팅 등에 관여하고 있다.
뵐라스는 늘상 자신의 디자이너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계기로 조부와의 관계를 언급한다. 미술에 조예가 있었던 뵐라스의 할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스케치와 페인팅을 가르치고, 고야, 에셔, 피카소 등 예술적 선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조부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뵐라스는 창작 촬동을 멈추지 않았고, 10대에는 그래피티를 방황기의 도피처 삼아 색채와 형태의 역동성을 탐구했다. 이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전향하는 과정을 거쳐 ‘모노’, ‘심플’, ‘미니멀’로 요약되는 지금의 스타일에 정착한 것.
지극히 사적인 근거로부터 출발한 뵐라스의 디자인관은 여전히 내적인 동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듯하다. 뵐라스의 반면교사(反面敎師)는 자기 자신이다. 그는 때때로 하던 작업을 멈추고 과거의 결과물들을 돌아본다. 지난 디자인이 ‘후져’ 보이기 시작한다면(‘looks like a shit’) 그야말로 발전의 증거가 아니겠냐는 소박한 논리다.
실제로 그는 작업 전에 어떤 공정이나 계획, 초안도 세우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게 디자인은 ‘형태’들과 벌이는 몸부림일 뿐이라고. 이 느슨해 보이는 태도에서 어떻게 그토록 합리적이고 미니멀한 작품들이 탄생했을까? 뵐라스가 “올바른 조화를 실어 나르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디자인의 목적으로 여기는 덕분이다. 엄격한 정확성과 조화의 추구, 뵐라스 디자인의 키(key)다.
참고_ www.timboelaars.nl www.yassinebentaieb.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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