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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HIV 양성 혈액을 사용한 이유 제이슨 로미코(JASON ROMEYKO) 조회수 13599

<반가르디스트(Vangardist)>의 HIV 특별 기획호는 그 자체로 불가능한 건 없다는 걸 증명한 하나의 사례이다. 오랜 기획 기간을 거치며 우리는 HIV에 대한 편견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매거진 자체에 일종의 금기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로 했다. 매거진의 글과 이미지 등 모든 내용을 에이즈 환자로부터 기증받은 혈액으로 만든 잉크로 인쇄하기로 한 것이다. 한편 매거진의 내용에는 HIV 보균자 혹은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사제공 | 월간 CA


이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신규 HIV 감염자 인원이 80%나 증가한 상황을 알리고 이와 관련해 인도적 차원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감염자 수 증가의 원인을 HIV에 대한 인식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마치 HIV가 이미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고 HIV에 관한 사회적 담론 부재가 이에 대한 토론을 끌어내는 걸 새삼스러운 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식의 침묵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 

우리는 기획 의도의 당위성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이를 통해 HIV에 대한 편견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매거진이 발행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사회적 관심과 포용 속에 스스로 HIV 양성 반응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에서 정작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법적인 부분이었다. 우리가 HIV 양성 혈액을 혼합한 잉크를 사용한 것은 기본적으로 법적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HIV는 인체 외부로 노출되면 바로 죽어버려 혈액 자체로는 전혀 해가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HIV 보균자와의 신체 접촉 역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하버드와 인스브루크 대학교에게 자문을 구해 혈액을 저온 살균 처리까지 했다. 그런데도 미국에서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해 법적 공방이 벌어졌다. 우리의 인쇄 방식에 충격을 받아 정신적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호할 방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밝혀둘 것은 우리는 재사용 가능한 밀봉 포장지로 매거진을 포장하여 사람들이 매거진을 읽을 것인지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는 것이다. 포장을 뜯는 행위는 편견을 무너뜨린다는 개념을 대변하며 사람들이 스스로 해당 문제에 대해 주체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포장을 뜯는 걸 선택했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법적인 논란은 오히려 우리의 의도가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는 별개로 우리가 풀어야 했던 또 다른 과제는 인쇄기에 잉크를 어떻게 넣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요즘 주로 사용하는 가루 형태의 잉크에 혈액을 혼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과적으로 혈액과 식염수를 섞은 용액을 링거를 이용해 인쇄기 내부에 골고루 뿌림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매거진의 표지 디자인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반가르디스트>는 패션 감각에 민감한 세련미를 내세우는 매거진으로, 표지에 항상 강렬한 이미지의 인물 사진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번 기획 프로젝트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긴박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인물 사진을 포기해야 했고 이는 정체성이 확실한 매거진으로서 절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우리는 대신 HIV 양성 혈액을 섞지 않은 일반 잉크로 인쇄한 일종의 ‘음성 버전’의 새빨간 표지 이미지를 활용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이 이미지를 패턴으로 활용한 타이포그래피를 ‘양성 버전’의 표지에 사용함으로써 매거진에 담겨 있는 내용을 암시한 것이다.

<반가르디스트>는 진취적인 남성을 위한 매거진으로 10만 명 이상의 온라인 정기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매거진은 비엔나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의 HIV 기금 조성 연례행사 라이프 볼(Vienna’s Life Ball)의 일정에 맞춰 발행되었고 <반가르디스트> 독자들의 인식을 일깨우는 것을 시작으로 HIV에 대한 편견 파괴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장소, 시간, 반응을 모두 고려한 한 수였다.

물론 우리의 이러한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그중 일부는 정말 바보 같은 의견이기도 했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결과는 엄청났다. 일주일 만에 70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을 공유했으며 이는 5,400만 이상의 사람들에게 노출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수익금은 HIV 기금에 전달되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한 가지 배운 점은 자신에게 무언가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가슴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과정 중에 여러 장애물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방해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욱 견고히 할 기회라고 생각해라.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각오를 갖고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제이슨 로미코(JASON ROMEYKO)
SAATCHI-CH.COM
GSK와 도이치 텔레콤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총괄자이자 스위스 사치 & 사치의 수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또한 최근까지 토요타의 EMEA 관련 디자인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