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 채병록은 누구일까.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더니 소신 있게 살고 싶은 마음으로 그래픽적인 관점에서 축을 지키고 싶은 사람이라고 한다. 작품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디자이너, 모방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성을 들이는 디자이너,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깊이를 추구하는 디자이너 채병록을 만났다.
기사제공 ㅣ 타이포그래피 서울 (글: 인현진) |
| 최근 근황은 어떠신지요? 어제까지 파티(PaTI)에서 워크숍을 했어요. 2주 동안 ‘One Letter(한 글자)’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는데 예상보다 결과가 굉장히 잘 나와서 만족스러워요. 자기 색깔을 드러내며 잘 소화해준 친구들에게 고맙고요. 저도 타이포그래피를 전제로 작업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래픽이 기반이니까 이 친구들과 어떻게 해낼지 고민이었죠. 저 자신이 학교에서 티칭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닌데 기법으로써 만들어지는 과정도 재미있고, 뜻깊고 보람 있었네요.
작업에 동양적인 미학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본인의 작업 스타일은 어떤 편이라고 생각하세요? 한창 공부할 땐 서양의 모던 타이포그래피 영향을 받았지만, 어느 순간 문제점을 인식했어요. 굳이 동양적이 아니더라도 저의 아이덴티티와 오리지널리티를 찾고 싶었죠. 도제식으로 배운 편이라 스승에 대한 동경도 있고 한 가지에 철저하고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향도 있는 것 같아요. 평면은 모두 허구가 아닌가, 의구심이 들 무렵 입체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먼지 하나도 입체잖아요. |
| 기법이나 표현 방법에 대한 고민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면서 착시 조형 등 저의 기법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하나의 일러스트레이터나 회화적 요소로 멈추는 게 아니라 문자와 결합했을 때의 힘이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동양 문자, 한글을 작업하다 보니 제 색깔이 담기는 작업이 생겼고요. 물성에 접근하는 방식 등 일반적인 작업과는 많이 다르게 하고 싶었어요. 플랫한 게 싫었고 매체를 키우고 싶은 생각이 강했죠. 포스터에 접근하게 된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데, 본격적으로 큰 그래픽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죠. |
| 스승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애정과 존경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는 마음이 참 닮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꽃, 삶, 자유 등은 가닿을 수 없는 별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구체적인 것으로 파고들어 갈 수밖에 없다.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하다고나 할까, 특별하다고 느껴져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저는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다가서면 더 멀리 가 계시고, 그런 분이 스승님으로 계시는 것 자체가 복이지요. 나이 들어서까지 현장에서 작업을 계속해주시고 움직여주시는 모습에 자극을 받기도 하고요. 어떤 일이든 현재 맺고 있는 관계가 그냥 나타나진 않잖아요. 과정이 있는데 마치 그게 없다는 듯 말할 수는 없다고 봐요. 내 앞에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있는 것이고, 저는 또 제 뒤를 생각해야죠.
지금까지 어떤 분들께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가장 먼저는 안병학 선생님이고요,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건 민병걸 선생님의 영향이 컸네요. 일본에서는 사토 고이치 선생님 밑에서 배웠고요. 여러 분이 계시는데 같은 DNA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곳에서 각자 작업을 하고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어렸을 땐 좋은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일을 배우고 열심히 하니까 열심히 하는 분들과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
|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어떤 일인가요? 11월에 개인전이 있어요.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자전 준비도 하고 있는데 최근 과자를 3만 원어치 샀어요(웃음). 경험을 해봐야 나오는 게 있다고 믿거든요. 면을 주제로 작업했던 것도 제가 면을 진짜 좋아해서 예요. 면을 좋아해서 다큐멘터리 <누들 로드>의 음악감독을 맡았다는 윤상 씨와 비슷한 마음일 거예요. 문자로 하는 작업으로는 '축복' 작업을 매년 하고 있어요.
작업하신 포스터를 보면 굉장히 섬세한 면도 있는데 동시에 선이 굵은 특징이 보이는 게 모순되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요. 아버지가 건축을 하셨는데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구조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요. 데생이라는 입시교육을 안 받은 영향도 있어서인지 제 안엔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아요. 부족함을 보완하려다 보니 기계적으로 뽑아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고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경우죠. 어떻게 보면 작업이라는 게 벼농사와 비슷해요. 좋은 토양에서 잘 가꿔주고 정성을 기울일수록 좋은 쌀이 나오는 것처럼 작업도 그렇거든요. 사랑하고 만져주면서 잘 키워주는 거죠. 이렇게 말하지만, 저도 아직 뭐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고, 여전히 진행 중인 디자이너예요. 앞으로도 현장에서 오랫동안 표현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요. |
| 그는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넘기지 않는다.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철저한 탐구심은 작업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질투와 시기가 자신의 힘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채병록과 한 인간으로서의 채병록을 구분 짓지 않는다. 자고 먹고 놀 때도 디자이너로서의 긴장감을 즐긴다.
일본 유학은 어떻게 가게 되셨는지요? 졸업하고 일을 하다 보니 책 작업과 월간지 작업이 저랑은 안 맞더라고요. 평면작업에서 꼼꼼하게 파고드는 건 괜찮은데 페이지가 바뀌면 힘든 거예요. 점점 회사원이 되어 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고민도 많이 하게 됐고요. 유학을 갈 거면 어느 학교냐 보다 누구에게 배우냐가 중요했어요. 사토 고이치 선생님께 가게 된 건 그분의 그라데이션 작업을 보면서 감화를 받아서인데 그 작업은 결국 빛과 시간이거든요. 들인 정성이 어마어마하죠.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을 회화 작가라고 불러도 본인은 디자이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점도 접근방식 때문이고요. 그런 걸 배우고 싶었는데 초반엔 엄청 혼났어요(웃음).
굉장히 엄격한 스승이셨나 봐요. 네. 엄격하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네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이럴 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소리도 듣고. 그때까지 하던 대로 모던식의 작업을 만들어 가면 네가 해온 작업은 나는 해본 적도 없고, 하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랑 이야기하려면 너의 것을 가져와라, 왜 여기 왔니, 왜 나한테 배우려고 하느냐고. 그때만 해도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이 안 되어 있었죠. 졸업하기 전에 작품집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너라는 제자가 내게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고. 밤새워 만들어드리면서 선생님께 배워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했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아니다, 너는 이미 달라질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 왔고,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말씀이 제겐 초심처럼 남아 있어요. |
| 디자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디자인은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일이니까 직업이니까 돈 받고 해야지, 가 아니라 먼저 내 작업에 정성을 기울여야죠. 하나하나 꼼꼼히 만드는 게 정성일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디자인이 나오는 것 같아요. 직접 부딪쳐보고, 최대한 정성을 기울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질투가 시기가 강한 편인데 그게 작업에 집요하게 드러나서 저만의 것이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이건 뭐지? 라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사토 선생님께서 와, 하는 작업은 2등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어랏, 하는 작업은 꼴찌이자 1등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다른 시각으로 표현해보고 싶어요. |
|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말씀을 해주세요. 구글링이나 핀터레스트를 많이 하는데 리서치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고요. 아카이빙이 자신의 실력과 능력은 아니거든요. 많이 보면 눈은 높아지지만, 실제 자신의 실력은 어떤가, 점검하는 것도 필요하죠. 시각적으로 쇼핑만 하면 마음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거기에 자기는 없어요. 조형적인 멋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파고들면 오히려 만들어내는 게 많아져요. 스토리가 있으면 깊이와 심도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지거든요. 자기 멋에 빠지지 않으면서 호흡을 길게 하고 신중해졌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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