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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낙서하기, 네모칸을 벗어나거나 말거나 칼럼-디자이너의 낙서 조회수 12746

 

 

8년 전에 몰스킨 노트북을 우연히 구입하게 되었다. 비싼 노트지만, 피카소도 썼다고 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몰스킨 노트북은 무늬가 없는 플레인(Plain), 그리드가 있는 스퀘어드(Squared), 밑줄이 그어져 있는 룰드(Ruled)가 있는데, 이 중에 스퀘어드를 샀다. 

A5 종이쯤 되는 크기의 검은색 노트였는데, 때마침 졸업 논문을 준비해야 해서 모든 기록을 이 노트북에 했다. 스퀘어드 타입의 노트는 네모난 격자가 전면에 채워져 있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선을 이리저리 긋기 힘들다(그물에 갇힌 물고기라고 할까). 꼭 네모 칸과 선에 맞추어 면을 채우거나 선을 긋는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처럼, 한 계단씩 그림을 그리는 식이다. 면을 그릴 때는 벽돌을 쌓고는 다시 틈을 맞추어 다음 벽돌을 올리는 식으로 구조적으로 그리기 좋다. 선을 그릴 때도 자석에 이끌리듯 네모 칸을 따라 직선과 대각선을 긋기 쉽다. 테트리스는 쌓아서 없애는 맛이지만, 스퀘어드 노트의 낙서는 쌓아서 채우는 맛이다.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 서울

 

 

문제는 딱 맞게 짜인 틀 때문에 자유롭게 휘갈기기 조심스러워진다. 더구나 몰스킨이라니… 비싼 가죽 노트에 하나라도 더 채워서 써야지! 라는 압박감으로 성실하게 규칙적으로 낙서를 한다. 낙서뿐이 아니다. 격자가 그려진 화면이나 화장실 타일 무늬를 보면 지금도 네모난 상자와 계단을 그려 넣고 싶어진다. 

 

체스나 바둑은 이런 격자를 이용해 규칙을 지키며 게임을 한다. 한 칸, 두 칸이라 표현하지 이만큼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격자에 갇힌 낙서는 게임처럼 규칙을 만든다. 가장 작은 단위를 정하고 원, 네모, 마름모로 그림을 그린다. 사람의 눈을 사각형으로 그러거나, A, B, C…. 알파벳을 사각형 몇 개로 만든다. 

 

이런 규칙을 지키다 보면, 전화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몇 번째 격자에 네모를 그리고, 그 옆에 다음 네모를 그리시오.”라는 설명서를 받으며 말이다. 이런 규칙에 갇혀 낙서를 하다 보면, "나오는 게 뻔할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규칙적인 것에서 불규칙한 모양이 나온다. 생각 없이 한 칸씩 선을 줄에 맞추어 그리거나 면을 채우다 보면 이상한 모양이 나타난다. 

 

그러다가 나 같은 덩치 큰 놈이… "작은 노트에 이러고 있다니!"라는 생각이 들면 격자를 탈출하여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때도 있다(역설적으로 이런 그림은 귀여운 얼굴 또는 아이가 대부분이다). 어찌 되었든, 격자에 갇힌 낙서는 생각처럼 규칙적이지도 않고, 생각만큼 불규칙하지도 않다. 오히려 다양한 규칙적 형태가 모여, 불규칙한 전체 이미지를 만든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이라는 책을 쓴 니콜라스 네그로폰테라는 MIT미디어랩의 설립자가 있다. 아날로그는 만질 수 있는 아톰(Atom)으로 이루어져 있고, 디지털은 0과1로 구분되는 가상의 비트(Bit)로 되어 있다고 한다. 격자무늬 속 낙서는 아톰과 비트가 뒤섞인 묘한 매력이 있다. 

 

규칙적인 0과1의 디지털 격자무늬에 펜의 불규칙한 잉크 방울이 만나 이상한 화음을 연주하는 거랄까.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가 번져나가 음을 이탈하는 것처럼, 규칙 속에서 미묘한 떨림을 만들어 낸다. 

 

낙서란, 규칙 속에서 발견하는 어색한 모양과 예상치 못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므로 하얀 종이에 자유롭게 그림만 그린 창작자에게는 스퀘어드 노트가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하얀 종이를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규칙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은 모두 그리는 이의 몫이다. 

 

 

 

 


강구룡

그래픽디자이너, 디자인 저술가. 포스터와 책을 주로 디자인하지만, 디자이너로 작업하며 실패한 경험과 성공 이야기를 8:2로 버물려 글도 쓴다. 틈틈이 이 둘을 왔다갔다하며 낙서를 한지도 제법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린 낙서로 조만간 새로운 책을 내려고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