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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딕 700 / 혁신적인 활자 시스템, 윤고딕 700 조회수 20588

윤고딕 700은 혁신적인 활자체 시스템이다. 내가 그것을 '혁신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아홉 단계에 걸친 획 굵기 차이에 따라 글자의 ‘크기’가 달리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글자라도 가장 가는 윤고딕 710과 가장 굵은 790으로 짜서 비교해보면, 후자가 절대적으로 더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글 | 최성민(그래픽디자이너)
기사제공 | 타이포그래피 서울


가는 글자와 굵은 글자를 같은 크기로 만들면, 굵은 글자에서는 획 사이 공간, 즉 글자 속 공간이 좁아지므로 시각적으로는 같은 크기의 가는 활자체보다 작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윤고딕 700에서는 굵은 체가 가는 체에 비해 크기도 조금 더 크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오히려 크기가 고르게 보인다. 이 점은 글자를 하나씩 떼어 비교할 때보다 실제로 글줄을 짜놓고 볼 때 더 뚜렷이 드러난다. 이는 자연스러운 광학적 현상이고, 그런 현상을 반영한 디자인이 뭐 그리 혁신적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오래 다룬 사람이라면 그 차이가 얼마나 근본적인지 쉽게 알 수 있을 테다.

활글자 너비 체계를 기준으로, 활자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글자 형태에 따라 너비도 다르게 설정하는 비례 폭 활자체고, 다른 하나는 개별 글자의 특성을 무시하고 모든 글자를 같은 너비로 만드는 고정 폭 활자체다. 로마자에서는 비례 폭 활자체가 일반적이다. 예컨대 'I'와 'M'은 보통 다른 너비를 차지한다. 반면 대부분의 한글 활자체는 일정한 너비를 모든 한글 글리프에 적용하고, 문장 부호나 숫자만 조금씩 너비를 조정한 혼합형 고정 폭이 주류를 이룬다. 이런 고정 폭 우선주의는 여러 굵기 활자로 구성되는 활자 가족으로도 연장된다. 그래서 한 가족에 속하는 활자는 굵기를 불문하고 모두 같은 너비 체계를 갖게 된다. 그 결과, 수치상 같은 크기로 짜더라도 굵은 체로 짠 문장은 가는 체 문장보다 작아 보이는 현상이 생기고, 까다로운 디자이너는 고른 시각적 크기를 얻으려고 굵은 체를 조금 크게 짜는 기교를 부리게 된다.


그런데 윤고딕 700은 이런 관행을 무시했다. 내가 알기에는 한글 본문 활자체 디자인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시도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와 관련해 깊은 뜻을 품는다. 전통적 한글 조판은 글자들의 너비가 같다는 가정에서 이루어졌다. 글자 너비가 '전각'을 기본으로 한다면, 글자 수에 따라 정확한 글줄 길이와 글 덩어리 면적을 계산할 수 있다. 전각 활자에서 글자 크기를 3mm로 설정하면 한 글자가 차지하는 너비도 정확히 3mm가 된다. 그러면 한 줄에 30자를 짰을 때 그 줄의 길이는 90mm가 될 것이다. 문장 부호나 간격 등을 반각이나 3분의 1각으로 짜면 계산이 복잡해지기는 하나, 이론상으로는 여전히 정확한 계산과 제어를 할 수 있다. 지면을 원고지처럼 격자로 나눈 다음 빈칸에 글자를 한 자씩 집어넣는 개념으로 조판에 접근할 수가 있다.

활자가 물체로서 존재하던 시절의 이런 조판법은 고무줄보다 유연한 디지털 조판의 등장으로 근거가 약해졌지만, 유독 한글 활자체 자체의 디자인에는 그 개념이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윤고딕 700 이전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물리적 수치가 아니라 시각적 현상을 기준 삼는 접근법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킨다면, 완전한 비례 폭 한글 활자체 개발도 가능할 법하다. 윤고딕 700은 아직 거기까지 나가지는 않아서, 폰트별 기준 너비는 다르지만 한 폰트 안에서 한글 글리프의 너비는 모두 같다. 이상적으로는, 예컨대 ‘비'와 ‘빼'가 조금 다른 너비를 차지할 정도로 공간 배분이 섬세한 활자체를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그처럼 미묘한 공간 조정을 미리 거친 활자체가 과연 필요한지는 별개 문제다.)


그런데 윤고딕 700에서 굵기에 따른 시각적 보정을 너비뿐 아니라 높이 관련 수치에도 적용한 것은 조금 혼란스럽다. 예컨대 윤고딕 790은 710보다 더 ‘높다'. 전각 자체의 크기가 다른 듯하다. 그래서인지 텍스트 상자에서 첫 번째 기준선을 전각 높이에 맡기면 굵기에 따라 그 값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굵기에 따라 한 줄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달라질 뿐만 아니라, 같은 상자에 들어가는 글줄의 수도 달라진다. 나는 이런 특징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전각이나 기준선의 수치는 일정하게 유지하되, 그 안에서 형상이 차지하는 크기만 달리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윤고딕 700은, 무엇보다 개념 면에서, 오늘날 한글 활자체 디자인에 관해 과감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무게는 세부적인 글자 모양이나 개별 특징의 장단점을 훌쩍 넘어선다. 윤디자인이 한글 활자체 디자인의 관습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한글 활자체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연구 과제를 던진다는 점에서 윤고딕 700은 특히나 반가운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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